춘추전국

상앙과 자산

삼긱감밥 2020. 12. 15.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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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과 자산은 각각 진나라와 정나라의 법가사상가이다. 그들이 속한 시대도 달랐고, 국가나 역할도 달랐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법을 집행하여 부국강병하는데에 목표를 두었다. 법가사상가들은 다른 사상가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는데, 특히 유가와 많은 마찰이 있었다. 유가에서 바라볼 때 법에 의한 통치는 인의와 예를 통한 통치를 포기하고 혹독하게 정치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상앙은 진나라에서 법가 개혁을 추진하면서 많은 반대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엔 상앙 본인이 반대세력에 의해 온몸이 갈갈이 찢기여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산은 그렇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자산을 칭찬하는 기록이 남아 후대에 전한다. 특히 논어에서 공자가 "자산을 어질지 못하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나는 믿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 전한다. 그는 어떻게 엄격한 법치를 하면서도 원망을 받지 않고 어질다는 평을 들을 수 있었을까.

 

자산 역시 법을 느슨하게 집행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후임자에게 엄격한 법 집행이 느슨한 집행보다 훨씬 낫다고 권했으며, 형정에 법을 새겨넣은다음 주조하여 다른 이들에게 보이도록 했다. 정나라 백성들은 그의 통치에 수년간 분노하여 자산이 죽기를 바라는 노래를 부르며 저주를 했다. 그러나 그는 법을 단순히 엄격히 집행하여 혹독한 정치를 하는 것에 정치의 묘가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법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그것이 도구로서 쓸모가 있기 때문이지, 법이 모든 사상에 우선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지혜, 정치적 중재를 모두 사용하며 유연한 통치를 했다.

 

그는 자신을 비판하는 유가의 사상가에 대해 반박하지 않았으며, 법치를 통해서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고 나라를 안정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여론을 매우 중시하였다. 상앙은 자신의 법치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모두 잡아들였다. 그러나 자산은 자신에 대한 비판 역시 참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당시 정나라에는 지방의 지배계급 자제들을 교육하는 향교가 있었는데, 이것이 변질되어 다양한 사상과 의견이 오고가며 비판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러자 당시 관리중 한 명이 자산에게 향교를 폐찌할 것을 권했다. 자산은 항교를 없애자는 건의를 물리치고, 그들이 토의하면서 칭찬하는 점은 유지하고 비판하면 고치면 된다고 답한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의 비난을 막는 것은 홍수를 막으려는 것과 같아서, 물길을 터서 돌아 흐르게 함만 못한 것이었다.

 

자산의 통치를 증오하던 사람들은, 자산이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치자 오히려 이후엔 자산을 칭찬하는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자산이 죽자 그들은 이제 정나라는 어떡하냐며 눈물을 흘리고 몹시 비통하게 여겼다. 

 

상앙이 법이 모든 사회를 구석구석 통제하는 완벽한 시스템 국가를 만들려 했던데에 반해, 자산은 법을 제1의 가치가 아닌 수단으로 삼고 강온과 온냉을 조절하며 유연한 정치를 했던 것이 그들의 결정적인 차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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