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마사

아우구스투스의 업적과 티베리우스

삼긱감밥 2021. 3. 2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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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많은 업적을 이뤘는데, 속주 행정 체계를 정비한 것도 그중 하나이다. 속주 총독의 임기를 연장하고, 총독을 잘 하는 사람이 계속 같은 주나 다른 주의 총독을 맡을 수 있게 하였다. 때문에 모이시아 등에서 오랜 임기를 유지하는 총독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임기가 보장된 속주의 총독들은 원로원 속주의 총독보다 더 부패를 덜 저질렀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권위를 강화해주는 척 하여, 원로원에 있는 사람들이 속주 총독의 부당이득 반환 소송에 대한 법정이 되도록 했다. 물론 실질적인 군주정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런 저런 행동을 통해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권위를 높여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전까지 정복되지 않았던 히스파니아 내륙 지역에 대한 전쟁, 알프스 종족에 대한 전쟁을 성공적으로 벌였다. 그러니 동시 다방면에서 전쟁을 할순 없었다.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지역에 대해서는 전투를 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지역이 바로 파르티아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과 로마의 상승하는 국운만 믿고 전쟁을 벌일 만큼 아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파르티아와의 접경 지대에 약소국을 완충 지역으로 삼고, 파르티아와는 직접적인 전쟁을 삼갔다. 또한 전쟁보다는 외교를 선택하여 도발을 자제하였다. 

 

파르티아 측도 내부 정비를 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로마와의 전쟁을 하지 않았다. 또한 로마와 파르티아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교역을 활성화시켜서 팔미라 등의 도시가 번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서로 이득을 본 셈이다. 이런 그의 노력은 이후 파르티아 군이  크라수스와의 전투에서 빼앗았던 로마 군기를 돌려주고 그때까지 살아있던 로마 포로들을 되돌려주는 업적을 이루어내게 된다. 그야말로 탁월한 성과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로마 군기를 되돌아오게 했다는 사실을 주화에 새겨서 널리 널리 알렸다. 

 

오늘날의 모로코와 알제리 지역에 해당하는 누미디아에 대해서는, 안토니우스의 사위인 유바를 왕으로 삼아서 지적인 통치를 하도록 하였다. 직접 통치하기에는 거리도 멀고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유바는 좋은 통치를 펼쳤다. 

 

다만 이런 아우구스투스 시기에도 로마의 실수가 있었는데, 바로 대 게르만 전쟁에서의 실패이다. 그가 임명한 바루스는 토이토부르그 숲에서 게르만 군대에게 기습을 당해 대패하고 그의 부대는 몰살당하고 만다. 모든 군단이 전멸하자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소리질렀다고 한다. 이로 인헤 로마군은 게르마니아 내부로 진출하여 국경선 방어를 강화하는 대신, 강을 따라 이루어진 방어선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태도를 굳힌다. 이런 기조는 오랜 세월 지속되었다. 대신 로마인들은 보헤미아의 왕을 지원하여 영향력을 끼치는 등 이후에는 게르만 족의 내분을 꾀했다. 

 

이후 트라키아의 미정복 지역을 점령하고, 이집트 남쪽 지역과 국경을 확정지었다. 이렇게 로마의 강역이 대강 확정되었고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기틀을 잡은 인물이 되었다. 

 

다만 이런 아우구스투스도 불안을 야기하는 행동을 했는데, 후계자 선정에 관해서 분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후계자는 결국 티베리우스가 되었으나, 그는 티베리우스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한 행동을 하고 마치 티베리우스를 예비 용으로 남겨놓는 듯이 다른 이들에 관심을 갖는 이들을 반복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대신 선택한 이들은 대부분 전투 중에 죽거나 자연사, 병사하는 바람에 티베리우스 이외에는 선택 사항이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말았다. 물론 이런 결과가 나오기 전에 티베리우스는 이미 크게 감정을 상하고 냉소적인 성격이 된 후였다.  위대한 업적을 세운 아우구스투스지만 티베리우스와의 관계는 불안불안했다. 

 

아우구스투스가 행한 종교, 사회적 제도 변화도 행정, 군사적 업적에 비하면 미치지 못하는 편이다. 

 

이외에 아우구스투스는 화폐 제도를 정리하고, 건축 면에서 큰 업적을 쌓아 로마를 대리석의 도시로 변모시켰다. 아우구스투스가 전역병을 위해서 새로운 재산을 빼앗기 보다는 농지를 나눠주고 식민시 경영을 장려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그가 죽자 티베리우스가 1인자가 되었는데, 그의 냉소적인 성격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지 못하였다. 그의 행동에 대해서 우호적인 사람도 별로 없었다. 물론 티베리우스가 무능한 황제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제국의 재정을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혁신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불필요한 오락을 줄이고 조세를 경감하여, 더 적은 세금을 걷고도 국고가 풍족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오락을 줄이자 로마 시민들의 볼거리가 줄어들어 로마 인들이 황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원로원 의원들도 티베리우스를 진심으로 신뢰하기 보다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면서 복종하는 편을 택하였다. 

 

이는 어느정도 구조적인 문제인데, 티베리우스가 프린켑스로서 1인자의 힘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해도 원로원은 늘 전전긍긍해야 했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가 의견을 제시하면 모든 사람들은 그에 따르는 것이 안전했다. 그가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그의 의견이 어떤지 추측하고 말을 삼가는 것이 안전했다. 때문에 원로원은 점점 의견을 내세우기 보다는 티베리우스의 권위에 복종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티베리우스가 종종 로마를 떠나서 다른 지역에 머무르자 그의 의견을 기다리면서 이런 경향이 가속화되었다.

 

티베리우스는 고대 세계의 군주 치고는 자주 다른 곳을 향해 떠나 칩거하곤 했다. 그가 로마를 떠나서 음탕하게 놀았다나는 음해 기록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고 그는 학문을 장려하고 다양한 곳에서 온 학자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티베리우스를 싫어했고 그가 프린켑스의 지위를 처음에 사양했다가 나중에 후계자가 생기면 넘기는 조건부로 받을 때도 위선이라고 크게 의심하였다. 이렇게 유능하고 인기없는 황제는 로마를 강하게 만들고 아우구스투스의 기반을 다진 후에 죽었다. 

 

티베리우스 시대에 로마에서는 100여명의 사람들이 반역혐의로 기소되었다. 이들이 기소되었다고 해서 다 죽은 것도 아니고 처벌을 받은 것도 아니다. 티베리우스가 잡힌 사람들을 사면하거나 돌려보내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대 로마인구를 생각하면 이것이 많은 수라고는 할 수는 없다. 이 나라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두들이 누구를 죽일지 공표해서 살육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일인자인 티베리우스가 규율 범위가 느슨한 법을 가지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가 불행한 싹이었다. 이후 로마 황제들이 따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지식인들도 티베리우스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이때문에 티베리우스에 대한 문헌 중에는 그에 비판적인 것이 매우 많다. <역사>의 저자 타키투스도 딱히 티베리우스에게 우호적이지가 않다. 

 

그의 후계를 이은 사람은 칼리굴라였는데, 칼리굴라는 작은 장화라는 뜻으로 게르만 인근에 있던 시절 그의 어머니가 작은 장화를 신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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