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에 나오는 이스터 섬

삼긱감밥 2021. 6. 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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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는 첫번째로 몬태나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 다음 장에서는 과거에 붕괴한 문명의 예로 이스터 섬이 등장한다.

 

이스터 섬의 위치와 환경

 

이스터 섬은 칠레에서 남서쪽, 폴리네시아에서 동쪽에 위치한 섬이다. 가장 가까운 거주지역(핏케언 섬)과도 2100km이상 떨어져 있는 말 그대로 고립된 섬이다. 3개의 화산이 분화하면서 지반이 융기하여 생겨난 섬이다. 서북쪽은 어업에 적합하고, 남쪽은 농업에 적합하다. 대중문화에는 모아이가 있는 섬으로 잘 알려져있다. 이 모아이는 5층건물(약 21m)에 달하는 거대한 것에서부터 1~2층건물정도인 것까지 매우 다양하다. 모두 특별한 기계나 도구 없이 인력을 통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제러드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이스터 섬 사람들은 원래 폴리네시아 인들이다. 헤이에르달이라는 학자는 아마 남아메리카 사람들이 유럽의 영향을 받은 중세 이후에 서부해안에서 배를 타고 이스터 섬에 갔을 거라고 추측했다. (또 어떤 사람은 초고대문명의 흔적이라고도) 그러나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고, 실제로 생물학적, 문화적 증거는 그들이 폴리네시아에서 배를 타고 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아마 폴리네시아 동부의 망가레바 섬에서 타고 온 것 같다고 한다. 이스터 섬에 처음으로 사람이 온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는 기원후 900년이다. (돌고래의 뼈를 통해서 측정함)

 

이스터 섬에 처음 도착한 이는 호투 마투아(이스터 섬 말로 위대한 아버지)라는 사람이었는데, 아내와 6명의 자식들, 그리고 친척 몇몇을 데리고 섬에 도착했다. 놀라운 점은, 폴리네시아 사람들과는 달리 이스터 섬은 서양인들이 도착할 때 까지 고립된 채 생활했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고립된 세계에서 살아간 것이다. 이스터 섬의 기후가 아열대에 가깝긴 했지만 적도에서는 약간 멀었다. 따라서 적도에 위치한 폴리네시아 섬들보다는 온도가 낮았기에 이들은 코코넛을 주식으로 삼지 않았다. 그들이 주식으로 삼은 것은 주로 고구마였다. 가축으로는 닭을 키웠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폴리네시아 인들이 대부분 계획적으로 인근의 작은 섬들에 이주했을 것이라고 본다. 만약 무계획적으로 우연히 이주했을 경우, 그들은 가축이나 필요한 식물을 가지고 있을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경우 그들의 생존율은 극단적으로 낮아진다. 또한, 무계획적으로 이주했다면 동쪽에서 서쪽으로 부는 해류에 따라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주했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 지표나 생물학적 연대는 폴리네시아 인들이 끊임없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해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호투 마투아의 신화가 사실이라면, 그 역시 계획적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족과 친척을 모두 데리고 갔기에 단순한 표류라고 보기엔 어렵고, 오랫동안 외부와 교류가 없던 섬에서 그들이 살아남은 것으로 보아 약간의 동식물을 가지고 갔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인근 거주지역에서 섬까지 이동하려면(물론 현대의 과학기술을 거치지 않고) 17일정도 걸리기에, 표류로 섬에 도착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스터 섬은 다른 폴리네시아 사회와 다른 특이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사회가 정치적으로 통합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인근의 작은 폴리네시아 섬들은 작은 씨족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분열하였다. 대부분의 작은 섬들을 씨족들이 피자조각처럼 나누어 가진 것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이스터 섬은 피자조각처럼 각 씨족들에 의해 나뉘었음에도 정치적 통합을 이룰 수 있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그 이유를 섬의 완만한 지형과 지형의 편재로 설명한다. 일단 이스터 섬 자체가 적당히 완만하기 때문에 교류하기가 쉬웠다. 폴리네시아의 화산섬중에서는 계곡이 극단적으로 깊어서 서로 왕래가 어려운 지역이 많았고, 이런 험난한 지형은 통합에 큰 장애가 되곤 했다. 그러나 이스터 섬은 완만했기 때문에 비교적 통합이 쉬웠다는 것이다.

 

또한, 이스터 섬의 자원은 매우 편재되어 있었다. 이스터 섬의 집과 닭장을 지을 돌들은 분화구 근처에 주로 집중되어 있었고, 북쪽은 어업에 적합했다. 한편 농작물은 남쪽에서 자라기 좋은 환경이었다. 따라서 각 씨족들이 다른 씨족과 교류를 끊고 분리된 사회를 구성하기 매우 어려웠다.

 

이스터 섬에는 롱고롱고라는 문자가 있는데, 이것은 이스터 섬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롱고롱고 문자는 외부에서 들어온 나무나, 서양인들의 물건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추측하는 사람들은 노예무역선이 이스터 섬 사람을 잡아갈때,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서 위협을 느낀 이스터 섬 사람들이 어떻게든 구전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문자를 창안한 것이 아닌가 보기도 한다. 물론 서양사람들이나 남미 사람들의 문자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을 수도 있다.

 

마케마케

 

이스터 섬의 마케마케 신앙은 원래 여러 신앙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족장들의 권력을 뒤집어 엎는 쿠데타가 일어난 이후에, 쿠데타 주도 세력(군부 지도자들로, 마타토아 matatoa라고 한다.)들이 마케마케 신앙으로 섬의 신앙을 통합했다. 이 이후부터 섬 사람들은 새인간을 그리고 새기기 시작했다. 또한 용감한 남자들이 모여서 인근의 작은 바위 까지 헤엄쳐 갔다오는 행사가 열리게 된 것도 이 이후이다.

 

마케마케 신앙: 마케마케(makemake)는 이스터 섬의 신이다. 마케마케는 전사 신이었으며 만물의 생장을 주관했다. 어느날, 오래된 호박 안에 담긴 물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그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새가 한마리 그의 어깨 위에 내려 앉았다. 그는 새를 보고 그와 닮은 존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물고기를 만들고 바다를 생명으로 가득차게 했다. 그는 붉은 돌을 만들어냈고, 외로운 인간이 태어났다. 이리하여 이스터 섬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마케마케는 반은 사람, 반은 새의 몸을 하고 있었다. 마케마케 신앙이 이스터 섬에 널리 퍼진 시점에서는 이미 환경이 많이 파괴되어서 배의 제작이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배로 가장 가까운 유인도까지 14일을 이동해야하는 섬에서 섬을 떠날 수 있는 건 새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스터 섬 자체에는 과거의 다양한 육지새, 바다새, 40여종이 넘는 식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식물들은 다양한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살아남았지만, 이스터 섬에 사람들이 들어오고 몇백년이 안되어서 대부분 멸종했다. 육지새도 살아남지 못하였고 일부 바다새만 알을 낳는 정도였다. 

 

기타

 

*이스터 섬이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로 붕괴했다는 가설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가뭄에 의한 멸망, 기후변화로 인한 멸망, 서구인에 의한 파괴를 주장한다. 그러나 가뭄이나 엘니뇨 같은 재난은 이전부터 계속 있었다. 특히 1~2만년 사이에 이스터 섬에는 매우 심각한 건기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을 살아남은 식물들이 갑자기 멸종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이 시기에 급격한 기후변화가 잇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 역시 부족하다. 서구인에 의해 파괴가 이루어졌을 가능성 자체를 완벽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대항해시대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이스터 섬에서는 환경파괴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스터 섬의 돌은 주로 응회암이고 일부 다른 화산암석이 있다. 대부분의 돌은 거대한 닭장, 집, 돌담, 돌기단, 모아이, 모아이 모자등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모아이보다는 사실 모아이를 받치는 돌기단(아후라고 한다. 지금은 많이 파괴되어 그냥 돌처럼 보인다.)이 움직이기 어려웠다.

 

*돌기단 자체는 폴리네시아 섬에서도 보이는데, 그 섬들에서는 돌기단이 보조 사원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이스터 섬에서는 그런 용도로 쓰이지 않았다.

 

*모아이에는 눈을 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모아이에는 눈이 없고 극소수에만 눈이 붙은 것으로 보아 성직자들이나 고위 계급이 가지고 있다가 의식의 형태로 붙이지 않았나 추정한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환경이 파괴되기 전에는 돌고래를 많이 먹고 생선을 적게 먹었다. 이것은 매우 독특한데, 인근 폴리네시아 사람들은 생선을 매우 많이먹었기 때문이다. 폴리네시아 유적지에서는 생선 뼈가 매우 높은 확률로 발견되는 것에 비하면 신기한 일이다. 돌고래 뼈는 이스터 섬의 나무가 모두 베어지기 전에 카누로 돌고래 사냥을 나갔을 것으로 추측하는 큰 이유가 된다. 돌고래는 이스터 섬 인근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원래 닭을 많이 먹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21m짜리 초대형 닭장이 만들어졌다. 이는 다른 동물들이 대부분 멸종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쥐도 많이 먹혔다.

 

*이스터 섬 사람들은 원래 화장을 했는데, 나무가 지나치게 줄어들면서 나중엔 시체를 바짝 말려서 땅에다 묻게 되었다.

 

*식량 부족이 극단적으로 진행된 끝에 결국 카니발리즘(식인)으로 나아갔다. 모아이 카바카바(Moai kavakava)라는 작은 석상은 극단적으로 굶어서 갈비뼈가 선명히 드러나고 야윈 뺨을 가진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잠깐, 오키나와에도 이런 조각상 있지 않나?)

 

*이스터 섬에서는 유골이 무덤에서만 발견되지 않고 쓰레기더미에서도 발견된다. 종종 쪼개져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골수를 빨아먹은 흔적이 아닐까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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