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 중종실록

삼긱감밥 2021. 6. 10.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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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8권은 중종 편을 다루고 있다. 중종은 폭군 연산군을 성희안, 박원종등이 몰아낸 중종 반정을 통해 즉위한 임금이다. 따라서 그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권력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태종처럼 무력을 주도해서 반대 세력을 다 죽여서 올라간 것도 아니고, 인조처럼 반정에 참여한 것도 아닌 그냥 가만히 있다가 반정세력에 의해 옹립되었기에 중종의 발언력은 약했던 것이다.

 

따라서 중종 초기 정국은 공신인 박원종에 의해 주로 주도된다. 반정세력은 연산군 당시 총신중에서 임사홍과 신수근등만 제거하고, 사화에 주도적이지 않았던 관료 상당수를 반정공신으로 포섭한다. 그래서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았던 이들 중에 중종대에도 공신이 된 이가 생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점이다. 

 

우연하게도, 박원종이 정국을 주도한지 얼마 되지않아 자연사한다. 여기에 성희안까지 죽어버리니 갑작스러운 권력의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 딱히 중종이 권력을 쥐기 위해서 특별한 행위를 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죽어서 자연적 공백이 생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광조와 그를 따르는 선비들이 일련의 개혁 소장그룹을 형성한다.

 

조광조는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운 선비이다. 김굉필은 김종직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스승의 학문이 지나치게 사장(문장과 시)을 중시한다는 이유로 의절한 사람이었다. 조광조는 김굉필에게 유학을 배운뒤 성균관에 나아가 성균관의 나태하고 엉망진창인 학풍속에서도 스스로 배움에 열중하고 엄숙한 예를 지켰다. 이러한 조광조의 행동을 사람들이 따라하여 성균관의 학풍이 개선되었고, 그를 따르고 흠모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국의 공백을 이용하여 조광조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중종은 조광조를 거의 스승처럼 모시며 말을 듣고 승진시키기를 반복했다. 조광조는 이를 바탕으로 도교적 제사를 하는 소격서를 혁파하고, 과거에서 시와 문장만 본다며 인재를 천거하는 현량과를 도입했다. 현량과는 조광조의 패당을 뽑기 위한 정치저 기구라는 비판도 있으며, 실제로 조광조의 무리중에 아들이 현량과로 벼슬한 자도 있었다.

 

조광조는 유학을 닦으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으며 이것은 노비나 선비나 마찬가지라고 보았다. 또 인재를 균등히 등용하여 낮은 신분의 사람이라도 등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확실히 그는 성리학 원리주의적인 면도 있었지만 리더십과 큰 식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정치는 중종과 반대세력에 의해 무너진다.

 

원래 소장세력의 리더가 될 뻔한 남곤은 조광조의 비대한 권력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의 무리에 의해 비판당한 대신들 역시 조광조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자신의 반대 세력이니 말이다. 중종 역시 대신들이 조광조의 말을 따르는 것에 우려를 갖고 있었기에 이들은 합세하여 한밤중에 모인다음 조광조파 선비들을 모두 쫓아낸다.

 

이 과정에서 강경책을 제시한 것은 중종이었다. 신하들에 의해서 중종이 끌려다니거나 치맛바람 속에서 갈피를 못잡았다는 듯한 묘사를 하는 매체들이 있다. 하지만 실제론 중종이 훨씬 더 과격하고 폭력적인 대책을 주장했다. 중종은 강경책을 제시했으나 온건론을 주장한 신하들때문에 일부는 살아남고 일부는 죽음을 당한다. 조광조는 관아에 갇히자 술을 마셨다. 조광조에 우호적이었던 판서 이장곤이 심문을 맡자 조광조는 이장곤을 풍자했고, 결국 사약을 먹고 죽는다.

 

한편 영의정 정광필은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에는 제동을 걸면서, 조광조가 죽임을 당하게 되자 사림 세력들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은 과하다고 주장했다. 박시백 화백은 그를 묘사하면서, 중종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조언역에 머무른 명재상이지만 중종이 조광조와 함께 양 축으로 삼았으면 정국운영에 좋지 않았을까 추측하였다. 정광필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사림 세력은 무너진다.

 

박시백 화백은 크게 조광조가 죽은 이유를 4가지로 분류하나 본질은 권력에 있었다. 조광조 일파가 구세력을 사장에 집중하는 이들로 몰고, 조광조 일파가 왕이 가져갈 명망마저 가져간 것에 불안을 느낀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조광조 탄핵의 한 축이었던 남곤은 이후 자신의 행위를 후회하고 사건의 수습에 애쓰다 죽는 날까지 비탄해하며 죽었다. 중종이 그렇게 과격하게 나오지 않았다면 남곤이 비탄해할 일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중종은 자신이 신임하여 크게 키운 조광조를 자기 손으로 죽임으로써 권간의 정치에 신호탄을 쏘았다.

 

조광조 이후에도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등용되었다가 왕의 신임을 잃고 죽음을 당하는 이들이 등장한다. 김안로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중종의 신임에 따라 조정의 실세에서 개죽음까지 다양한 처지를 맛보게 된다. 이런 중종의 정치에 대한 사관들의 평과 박시백 화백의 평은 차다. 평소엔 온화한 왕이었지만 왕권을 유지하고 신하들을 견제하기 위해 권력을 쥔 신하를 키우고 죽임으로써 정치가 하루도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고, 큰 식견 없이 작은 대처로 연연하느라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했으니 아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후 크다른 발전이나 개혁 없이, 중종의 후처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으면서 후계마저 불안해진 상황에서, 대윤과 소윤으로 나뉜 조정을 인종에게 남기고 중종은 죽는다. 일은 많았지만 실속이 없는 연연하는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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