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
조반유리造反有理 (모든 반항과 반란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구호
내전을 끝내고 통일된 중국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은 경제 성장이었다. 중국은 기초적인 사회간접자본을 설립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대약진 운동을 실행했다. 대약진이라는 단어는 <인민일보> 의 글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중앙에서 통제하는 계획경제 시스템 하에서 공업생산력을 증강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농촌의 인력을 동원하여 4가지 해로운 생물(모기, 파리, 쥐, 참새)을 없애자는 제사해 운동과 각 농촌에서 직접 철을 생산하자는 토법고로 운동이 시작되었다. 중국은 소련보다 미발전하여 기술이 부족한 상황이었고 유일하게 많은 것은 인력이었기에 나름의 방법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정책은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 제사해 운동에서 참새를 잡은 것이 화근이 되어 오히려 참새가 잡아먹던 메뚜기 등의 해충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또한 농촌에서 만들어낸 철은 너무 수준이 낮고 조악하여 제대로 쓰일 수 없는 품질 미달의 철이라서 토법고로 운동 역시 실패로 돌아간다. 여기에 흐루시초프 집권 이후 소련과 관계가 악화되어 지원이 끊기고 자연재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수천만명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은 정치적으로 타격을 입고, 수정적인 실용주의 경제정책을 제안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이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권력을 놓을 생각이 없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1960년대 중반 마오쩌둥 지지파의 정치적 공격으로 실각한다. 이후 마오쩌둥을 지지하는 열렬 청년 조직의 통칭인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을 반대하거나 비판한 이들을 자본주의 세력이라고 비난하며 붙잡아서 거리에 끌고 다녔다.
또 상당수 문화 유적이 낡은 문화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공격을 받아서 붕괴하였다. 이 일련의 정치적, 사회적 흐름을 문화대혁명이라 한다. 그 구호는 바로 조반유리造反有理 (모든 반항과 반란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였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의 결과로 중국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크게 후퇴했고 많은 지식인들이 자본주의 세력, 반 마오쩌둥 세력으로 몰려 사회적으로 린치를 당해야 했다. 공격의 대상이었던 류사오치는 이 후유증으로 죽었고, 덩샤오핑은 정치적으로 실각하였다가 마오쩌둥이 죽은 후 집권하여 실용주의 노선을 시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