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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삼긱감밥 2025. 1. 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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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는 북유럽에 위치한 바다이다. 이 바다는 중세 유럽과 근대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교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발트해가 아닌 육지로 각국을 지나 운반하려면 치안도 보장되지 않았고 각 지역을 뻘밭을 넘고 보급도 안되는 숲에 늪과 망한 마을을 지나서 운반해야 하는데 누가 해줄지도 의문이고 대체 이렇게 해서 뭐가 남을까... 결국 발트해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발트해에 위치한 많은 도시 국가들은 한자동맹이라는 동맹을 이루어 발트해 내에서의 이권을 보호하려고 했다. 함부르크 뤼베크 같은 도시들이다. 이 도시들은 주로 북부 독일 지역에 몰려 있었으나 발트해 인근 연안 지역에도 분포했다. 이 한자동맹 상인들은 무역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보를 교환하고 상선을 이용해 부를 모았다. 그러나 개별 도시 국가들의 모임이었기 때문에 군사력이 강하지는 않았고 주변 국가들이 힘을 키우고 중앙집권화하자 주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발트해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형이 바로 발트해에서 북해로 빠져나가는 곳에 위치한 덴마크와 노르웨이이다. 특히 덴마크와 현재 스웨덴 영토 사이의 좁은 지협은 과거에는 덴마크 영토였고, 덴마크는 여기를 바탕으로 발트해의 목줄을 틀어쥐려고 했다. 이를 위해 고안한 것이 존드 톨 로, 지나가는 선박에 받는 통행세이다.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여왕은 덴마크와 노르웨이, 스웨덴 셋을 연합으로 묶어 하나의 군주를 섬기도록 하는 형태를 만들고, 한자동맹에 대항하여 발트해에서의 패권을 가지고자 했다. 노르웨이를 덴마크에 복속시키는 것은 노르웨이의 약한 국력으로 인하여 어렵지 않았으나, 스웨덴은 끊임없디 이탈을 시도했다. 그래서 말이 칼마르 연합이지 스웨덴이 스웨덴 내부의 귀족을 필두로 자치하면서 이에 저항한 기간도 매우 길다.

 

덴마크는 발트해에서의 패권을 유지하고 싶어했지만, 발트해를 장악하기에는 덴마크의 해군이 강하지 않았고, 인구나 군사력도 특출난 부분이 없었다. 덴마크 노르웨이의 인구는 영토만 넓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아주 적었다. 스웨덴은 끊임없이 중세와 근대 내내 덴마크와 갈등하면서 계속해서 덴마크의 영토를 침공해 나중에 가면 덴마크가 지위하고 있던 스칸디나비아반도 남부와 고틀란드 섬이 모두 스웨덴에 넘어가게 된다.

 

스웨덴은 칼마르 연합에 계속해서 저항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연합을 깨버렸다. 이후 발트해와 북독일에서의 스웨덴 이권 보호를 위해 노력했다. 리보니아 기사단이 모스크바의 침공을 받자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연합하여 모스크바와 싸우면서 북부 에스토니아를 손에 넣었고, 이후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이면서 발트 해안가에서의 이권을 확보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는 튜튼기사단을 공격해 단지히와 비스와강 하구를 얻었고, 이후 리투아니아 북쪽의 리보니아 기사단을 쿠를란트 젬갈렌 공국으로 손에 넣었지만,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에서 끊임없는 공격을 당했고 나중에는 대홍수까지 겪으면서 패권을 유지하지 못했다. 폴란드 리투아니아 역시 해군이 약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다른 국가들을 견제하기 위해 와잉 군사력 증대를 요청하면 입법 기구인 세임이 거절하기가 일쑤였다.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경우 곡물을 발트해로 운반해서 네덜란드에 수출하는 일이 매우 긴요했고, 네덜란드도 이를 알았기에 폴란드 지주들에 대해 간섭하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 남부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발트해에서의 영향력도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근의 상륙 지점을 없애는 것이었고, 건너편인 포메른을 점령함으로써 이를 이루었다. 그리고 30년 전쟁을 비롯한 다양한 전쟁에 개입하면서 북부 독일의 강 하류를 노리고 발트해에서의 패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스웨덴은 북부 독일의 거점과 인저말란드, 리보니아, 그리고 영토가 아닌 일부 권리를 얻어내는 형태로 프로이센에서의 권리를 확보함으로써 발트해 패권에 매우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스웨덴의 확장은 한계가 있었다. 스웨덴은 해군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트해에서의 영유권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해서 육군을 주로 활용했다. 그러나 스웨덴 육군은 양보다 질 위주의 편제였고 스웨덴의 군사 개혁은 다른 나라도 언젠가 카피할 수 있는 것이었다. 또한 스웨덴은 외교적으로 동맹국이 없었는데, 프랑스가 있었으나 프랑스는 발트해와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으므로 제한적인 파트너 관계였다. 반면 덴마크-노르웨이, 북부독일 제후들, 러시아, 폴란드 리투아니아와는 갈등하면서 모두를 적으로 돌렸다. 신교 국가인 브란덴부르크에는 매우 강압적인 관계였다.

 

이후 동란 사태를 해결한 러시아가 점점 서쪽으로 진출하자, 마침내 스웨덴은 북방 전쟁에서 패해 러시아에게 발트해로 가는 창구를 열어주게 된다. 이후 러시아는 끊임없이 서진을 계속하여 귀족공화정 특유의 비효율로 약체화된 폴란드 리투아니아를 잠식해가다가 삼분할하고 패권국이 되었다.

 

발트해를 두고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국가들의 간섭도 있었다. 영국은 발트해 직항 루트가 아닌 다른 루트를 찾기 위해서 아르항겔스크 백해 항로를 개발하고 스웨덴이 모스크바보다 잘 나갈때 중재하는 척하면서 아르항겔스크를 노리는 것을 외교적으로 견제했다. 나폴레옹 시기에는 아예 강국이 되어서 코펜하겐 공격까지 한다. 네덜란드는 덴마크나 스웨덴에 투자하면서 이익을 얻기도 했다. 

 

스웨덴과 리보니아의 농업생산력은 영국과 네덜란드보다는 못하고 폴란드나 러시아보다는 좋은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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