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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마사 14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세력을 몰아내고 중, 남부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뤄낸 로마에게 다음 적은 카르타고였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 칸나이, 자마 전투뿐 아니라 전쟁을 이끈 한니발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명장들의 이야기, 한니발가 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고대 전쟁이다. 로마는 라틴인으로 구성된 국가로, 공화정체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를 다스리고 있었다. 로마는 비교적 다른 동맹을 맺은 시와 관계를 좋게 맺은 편이어서 그들의 처우는 다른 국가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이때문에 로마가 참여한 전쟁이 장기전으로 향해도 비교적 동맹들의 이반이 적은 편이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국가의 후계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원래 레반트 일대의 도시를 기반..

역사/로마사 2021.05.08

유스티니아누스와 동로마 확장 문제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는 하나된 로마 제국의 회복을 꿈꾸었고 그럴듯한 계획을 가졌던 마지막 비잔틴 황제다. 그는 벨리사리우스, 환관 출신의 나르세스 등의 장군의 도움에 힘입어 이민족과 싸웠다. 그의 치세 하에 비잔틴 제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으나 이는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고 나중에는 결국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말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남부 히스파니아에 병력을 보내서 다스렸다. 그런데 이 지역들은 콘스탄티노플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을 뿐더러 참으로 방어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가장 서쪽에 있는 남부 히스파니아는 주변 지역 없이 그 지역만 다스려서는 다른 이민족들의 침공을 막기가 어려운 장소였다. 해군으로만 방어가 되는 지역도 아니었다. 아프리카 역시 비자틴 제국이 잘 나갈때..

역사/로마사 2021.04.03

로마 멸망 원인

로마는 오랜 세월 번영을 구가하다가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으로 나뉘었고 서로마제국이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당하면서 맥이 끊겼다. 동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거점으로 점점 그리스화하여 천년을 더 살아남았다. 이것을 비잔틴 제국이라고 하는데 한때 비잔틴 제국의 강역이 로마의 반보다 약간 비슷해지기도 하였으나 어쨌든 서로마 제국의 영역 상당수는 회복되지 못하고 야만인과 다양한 종족에 의해 찢기었다. 따라서 로마는 서로마 제국이 망한 시점을 기준으로 끝이 났고 비잔틴 제국은 로마의 후신인 하나의 제국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에 대해서 왜 로마는 갑자기 몰락했나, 처참하게 망하였나 이렇게 접근할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위기를 겪으면서 점점 예전만 못한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기운을 ..

역사/로마사 2021.04.03

로마와 그리스 문화

지배자들이 피지배자를 정복하고 그들의 통치를 맡게 되면, 많은 경우에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는 일이 생긴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이 마치 문화를 전파해주기 위해서 그들을 정복한 것처럼 행세하고, 피지배자들은 힘에 눌려서 마지못해 이를 수용하고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없어지거나, 극렬하게 저항하거나 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 결과는 다르겠으나 양상은 대부분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주입하는 형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몇 안되는 예외가 있으니, 바로 로마다. 로마는 신기하게도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학문을 사랑했다. 피로스의 에페이로스나 마케도니아 등의 국가들이 쇠락하고 그리스 도시국가의 행방이 로마의 손에 맡겨지자, 로마는 그리스인들의 문화를 더욱 더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많..

역사/로마사 2021.03.31

로마 제국 경제의 어려움

로마는 제정으로 나아가고 점점 국가가 커지면서 다양한 문제를 겪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경제의 어려움이다. 이는 작게는 이탈리아의 어려움이고 크게는 제국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제정이 성숙하면서 이탈리아 시장을 장악하던 로마 도시들의 상품들, 농업과 산업이 위축되었다. 이는 주변 속주들이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고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가까운 내륙 도시보다 로마에서 먼 해안 도시 속주에서 로마에 물건을 운반하는 비용이 훨씬 싸서 굳이 이탈리아 내륙의 도시에서 내륙으로 물건을 구매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로마인들이 가진 운송 기술이 떨어졌고 말을 잘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해상 운송이 더 저렴한 것도 있다. 참고로, 당대 해상 운송의 한계로 해상 교역에서 주..

역사/로마사 2021.03.26

로마의 국경과 이민족 정책

로마가 성장하고 제국으로 나아가면서, 로마는 다양한 국가와 이민족을 맞이했다. 로마는 야만족들과 싸워 그들을 정복하거나 노예로 삼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기기 어려운 상대에게는 외교적 평화를 추구하거나 교란 술책을 시도했다. 로마가 다양한 국가와 민족과 국경을 닿고 있었기 때문에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국가와 전쟁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는 방어선 유지에 위협적이었을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였다. 로마가 상대한 이민족과 방법을 알아보자. *히스파니아 고대의 히스파니아는 오늘날의 이베리아 반도이다. 히스파니아에 원래 진출해있던 이들은 카르타고와 카르타고의 한니발계 가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베리아 반도 전역에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해안 지대에 진출해서 도시 위주의 삶을 살았다. ..

역사/로마사 2021.03.24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황제가 된 시점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느정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이미 당대에 60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황제는 여러 군 경험을 통해서 군대의 확고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데도 여념이 없었다. 이 점에서 그는 확실하게 네로와 달랐다. 비교적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음에도 황제가 되자 좋은 통치를 펼쳤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마를 효율적으로 통치했다. 오줌세를 비롯한 세금을 통해서 로마의 재무구조를 개선시키면서 10년 후의 통치 후 죽었다. 열병에 죽었다고 한다. 어차피 나이가 매우 많았으므로 자연사라고 봐도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장남이었던 티투스였다. 그는 성적으로는 좀 문란한 편이고 도덕을..

역사/로마사 2021.03.23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네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칼리굴라는 작은 장화라는 별명을 가진 이로, 티베리우스가 죽은 후에 친위대장의 추대를 받아서 즉위했다. 그는 처음에는 무난하게 통치를 하였으나 갑자기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 큰 병을 앓은 이후 신성에 집착했다. 티베리우스가 신이 되지 못한 것을 보고 뭔가 깨달은 것인지(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는 신으로 여겨졌으나 티베리우스는 그렇지 않았음), 자신을 신성화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하고 타인을 죽이거나 음모를 꾸미는데 노력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도 열심히 노력했다. 다만 삼촌인 클라우디우스는 너무 만만하고 멍청해보였는지 제거하지 않았다. 잔혹한 통치가 계속되지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칼리굴라의 통치에 질린 이들이 그를 살해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칼리굴라는 짧은 잔학한 통치를 하다가 죽고 말았다...

역사/로마사 2021.03.22

아우구스투스의 업적과 티베리우스

아우구스투스는 많은 업적을 이뤘는데, 속주 행정 체계를 정비한 것도 그중 하나이다. 속주 총독의 임기를 연장하고, 총독을 잘 하는 사람이 계속 같은 주나 다른 주의 총독을 맡을 수 있게 하였다. 때문에 모이시아 등에서 오랜 임기를 유지하는 총독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임기가 보장된 속주의 총독들은 원로원 속주의 총독보다 더 부패를 덜 저질렀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권위를 강화해주는 척 하여, 원로원에 있는 사람들이 속주 총독의 부당이득 반환 소송에 대한 법정이 되도록 했다. 물론 실질적인 군주정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런 저런 행동을 통해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권위를 높여 주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전까지 정복되지 않았던 히스파니아 내륙 지역에 대한 전쟁, 알프스 종족에 대한 전쟁을..

역사/로마사 2021.03.20

아우구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공화정 수호자들에 의해 암살당하자, 몇몇 사람들은 그의 부하 장군이었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유산을 상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언장을 공개하자 후계자로 지명된 것은 카이사르의 후손인 옥타비아누스라는 젊은이였다. 후순위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이들 중 하나인 브루투스(이후 카시우스와 동방을 다스려 아우구스투스와 대항한 브루투스가 아님)였다. 이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는 당시 젊은 나이의 사람이었는데, 놀랍게도 무서운 정치적 능력과 쇼맨십을 보여주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몫을 차지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옥타비아누스는 매우 특이한 캐릭터였는데, 그의 특징은 바로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들 중 하나이면서도 몸이 매우 약하고 전투에 약했다는 것이다. 로마는 전쟁을 ..

역사/로마사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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