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마사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

삼긱감밥 2021. 5. 8.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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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세력을 몰아내고 중, 남부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뤄낸 로마에게 다음 적은 카르타고였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 칸나이, 자마 전투뿐 아니라 전쟁을 이끈 한니발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명장들의 이야기, 한니발가 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고대 전쟁이다.

 

로마는 라틴인으로 구성된 국가로, 공화정체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를 다스리고 있었다. 로마는 비교적 다른 동맹을 맺은 시와 관계를 좋게 맺은 편이어서 그들의 처우는 다른 국가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이때문에 로마가 참여한 전쟁이 장기전으로 향해도 비교적 동맹들의 이반이 적은 편이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국가의 후계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원래 레반트 일대의 도시를 기반으로 카르타고를 비롯한 다양한 해양 도시 네트워크를 건설하고 무역에 힘쓴 이들이다. 그러나 이들 레반트의 도시는 레반트 일대가 다른 제국에게 점령당하면서 주도권을 잃었다. 남은 페니키아계 도시들의 리더로 떠오른 것이 바로 카르타고였다. 카르타고는 오늘날 튀니지 지역을 핵심으로 시칠리아 섬의 서부, 이베리아 반도의 남부와 동부를 다스렸다. 

 

카르타고인들도 정체는 공화정체였다. 하지만 로마인들과는 사뭇 다른 정체를 가지고 있었다. 로마인들의 공화정이 귀족의 힘이 강하지만 민중들도 나름의 세력을 이루고 발언권을 낼 수 있는 비교적 열린 구조였던 반면, 카르타고의 공화정은 사실상 과두제나 다름없을 정도로 민중의 권력이 약하고 폐쇄적인 사회였던 것이다. 

 

또한 카르타고는 자신들이 이끄는 페니키아계 도시에 몹시 혹독한 정책을 펼쳤다. 때문에 그들은 도시에서 민심을 잃었으며, 이전에 로마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들도 자진하여 카르타고 지지에서 로마 지지로 선회하는 일이 있었다. 또한 카르타고의 경우 상업을 지향하는 이들과 농업을 지향하는 이들의 다툼이 격렬하였다. 전쟁 기간중에 노잡이들을 데려가 토지 노동에 쓰는 일까지 발생할 정도로 정치적 혼란이 극심하였다.

 

인구는 로마가 카르타고보다 월등히 많은 상황이었다. 

 

종합해보자면, 로마는 이미 포에니전쟁 직전에도 꽤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보다 인구가 많았고, 내부의 정체가 다른 계층에게나 다른 동맹 도시에게나 안정적인 편이었다. 또한 로마의 육군은 라틴인 위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반면 카르타고는 여러가지 요소가 모두 로마보다 불리하였다. 카르타고의 인구는 로마보다 적었고, 로마보다 정체가 안정적이지 못하고 폐쇄적이었으며 갈등 해소도 잘 되지 않았다. 다만 카르타고도 강점이 있었는데, 사실상 지중해 무역의 지배자로 막대한 무역 수입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르타고의 육군은 대부분 카르타고의 부를 통해 고용된 용병들이었다. 이들은 충성심이 낮고 임금이 체불되면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용병 위주의 카르타고 군대는 혼란을 겪는 일이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시칠리아 섬을 두고 두 나라가 전쟁을 하게 된다. 당시 로마에서도 해양 무역에 투자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려는 이들이 있었기에, 지중해 무역을 장악한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시칠리아를 둘러싼 싸움에서 로마는 카르타고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카르타고도 세력이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이것으로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카르타고가 가진 힘이 쇠약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카르타고는 전쟁 중에 토지 귀족들이 노잡이를 노동에 쓰는 일이 있었고 전쟁 후에는 용병에게 돈을 제대로 지불하지 못하여 용병들이 내전을 일으키는 등 막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이후 카르타고는 절치부심, 히스파니아 지역을 점령하고 이후 로마와의 이어진 전쟁에서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에 진입한다.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을 상대하기 위해서 전투를 벌였으나 한니발은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중앙의 군대를 양쪽에서 감싸는 전술을 통해 로마군을 철저하게 섬멸했다.

 

하지만 애초에 로마가 강대한 나라였던 만큼 한니발은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니발이 다른 로마 동맹시들의 이반을 일으키기 위해서 부던히 노력하였지만 로마와 가까운 관계였던 동맹시들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로마 장군 파비우스는 한니발같은 뛰어난 장군과 싸우는 것보다는 지연전을 펼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이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한니발을 격파함으로써 로마가 승리하고 카르타고는 또 다시 패한다. 스키피오의 교란으로 로마군이 카르타고군보다 기병이 강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는 말이 있다. 이후 일어난 전쟁에서도 카르타고는 패하여 멸망하고 만다. 

 

이후 카르타고가 위치했던 지역은 로마의 아프리카 속주가 되었다. 아프리카 속주는 로마가 농사를 통해서 식량을 공급하는 영토로 사용하게 된다. 로마가 주로 곡물을 의지한 지역은 아프리카 속주(현재의 튀니지 인근), 시칠리아 섬, 이집트 등이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 동안, 그리고 그 이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지나친 성공으로 인해 파비우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견제를 받았다. 그들은 스키피오의 전쟁을 반대하고 그를 깎아내렸으며 어떻게해서든 그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해박한 그리스 지식 및 문화적 소양, 뛰어난 전술, 스스로의 인기 등으로 공화정의 위협이 될 수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따라 해박한 전략전술을 바탕으로 한 전쟁 업적과 인기를 바탕으로 유명인사가 되는 것을 꿈꾸었으며 이들이 로마 공화정을 멸망시키고 말았다.

 

한니발은 이후 동방에 의탁하여 한때 해군을 이끄나 로마는 동방으로도 진출을 거듭했고 이후 한니발도 죽고 만다. 

 

정리하자면 무역과 용병 위주의 카르타고를 내실있는 정체와 인구를 바탕으로 로마가 꺾고 올라선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로마는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제국의 후계자들을 꺾고 지중해의 패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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