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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45

청동 대포와 전쟁

유럽에서 14세기 무렵에 대포가 개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대포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포와 상당히 달랐다. 일단 대포의 모양이 지금의 모양과 같지가 않아서 화병 모양이었다. 또한 이동이 힘들어서 사실상 전쟁터에서 무기로 쓸 수가 없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에 대포는 초기에 바로 전장에 투입될 수 없었고 실험용으로 쓰여야 했다. 대포를 쓰더라도 제작해서 이동시킨 다음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이 잘 안되니 발사할 곳 근처에 만들어놔야 했다. 이후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대포에 많은 개량이 이루어졌다. 대포를 화병 모양에서 관 모양으로 바꾸었고, 대포를 이동시키기 위해 많은 구조와 형태 개량이 이루어졌다. 대포의 주된 재료는 청동이었다. 철은 좋은 자원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술력 부재로..

역사 2021.07.03

고대 세계의 전쟁 청동기와 전차

철기 시대 이전, 고대 세계의 전쟁에서 크게 분기점이 될 만한 변화가 두 가지가 있었다. 이 두 가지 변화는 고대 세계의 지배 계급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으나, 피지배계층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하나는 청동기의 도입이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장비로 쓰이면서 큰 변화를 이루었다. 새로운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전사가 출현하고, 청동을 이용해서 다양한 물건을 만드는 직인이 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전사 계급이 청동을 완전하게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사제 등 성직자 계급도 청동을 사용했기 떄문에 청동이 지배 계급의 상징이지 전사 계급의 상징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또한 이런 청동기 사용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청동의 보급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청동은 구..

역사 2021.06.20

중세의 대학들 / 중세의 두려움 / 기사와 십자군

중세의 대학 중세 유럽에는 학문 연구의 기능을 담당하는 대학이 있어서 학생들이 교수에게 수업을 받았다. 이 대학들은 오늘날의 대학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기관이었으나 몇몇 특징은 오늘날과 비슷하다. 대학에서는 법학, 의학, 신학을 주로 배웠다. 이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법학이나 의학이었고, 신학은 따기 어려운 조건들이 많은 데다가 워낙 수학 기간도 길어서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분야였다. 때문에 중세에도 사람들이 신학은 잘 배우지 않고 돈벌이에 좋은 법학이나 의학만 한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법학은 로마법이나 교회법을 배워서 관리가 되는 도구로 쓰였다. 어느 쪽이든 체제 유지에 필요한 기능이었고, 영국의 경우 중급 관리들이 법을 배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의학의 경우 오늘날의 수준높은 ..

역사 2021.05.23

중세와 수도원 / 카타리 파와 왈도 파

수도원 중세에는 다양한 수도원이 있었고 수도원 내부의 사람들이 필사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문화의 맥을 이었다. 수도원에 따라 운영 형태나 조직이 달랐는데 초기 비용 절감과 조직화, 수사의 일정 규율 작업 등 흡사 오늘날에 프랜차이즈가 생각나는 점이 있다. 베네딕트 수도원의 경우 영주의 큰 기증을 받아서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짓기 쉽지가 않았다. 한 번 지으려면 많은 재산을 내야 하는데 그정도의 부유한 영주도 적거니와 이런 것에 호의적일 영주는 별로 없었던 것이다. 시토 수도원의 경우 좀 독특하였는데, 이 수도원은 토지 개간을 하였다. 주로 큰 황무지를 받아서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 양을 키우기도 했다. 황무지를 받아서 수도원을 만드는 것이니 비용이 별로..

역사 2021.05.23

봉건제와 프랑크 왕국

로마 제국은 내외부의 문제로 점점 약해졌다. 제국의 관료제는 점점 더 유지하기 힘들어졌고 지켜야 할 국경은 많았다. 이런 와중에 게르만족이 로마 내부에 침입하자 로마의 영역 자체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프랑크족,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등은 각기 로마 내부에 침입해서 자신만의 영토를 확보했다. 서고트족은 히스파니아,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했다. 프랑크족은 자신들의 원래 거점인 라인강 인근에서 로마 내부로 들어왔는데, 서고트족 처럼 거주지를 깡그리 이전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기존의 영토를 버리지 않았다. 서고트족은 훗날 이슬람에 무너져 아스투리아스 왕국만을 남기고 멸망했다. 반달족은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당해 망하고 말았다. 동고트족 역시 동로마..

역사 2021.05.23

중세의 이베리아 반도

오늘날의 포르투갈,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는 고대 로마 시절에는 히스파니아 속주였다. 이 지역은 내륙은 이베리아 부족들이 다스렸다. 그들은 부족 수준이었고 국가를 세울 정도의 고도의 정치체제를 갖추지는 못하였다. 해안 지대는 카르타고가 다스렸으며, 포에니 전쟁 이후에는 로마인들이 히스파니아를 다스렸다. 히스파니아 지역은 서로마와 동로마로 로마가 분열하자 서로마에 속하게 되었는데, 본진인 이탈리아도 방어하기 힘든 상황에서 서로마 제국이 히스파니아를 잘 지킬 방도가 없었다. 때문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 왕국이 히스파니아에 들어오는 상황이 된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 왕국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국가였다. 그러나 그들의 나라는 왕위 계승이 혼란스러운 나라였고 부자간의 상속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역사 2021.05.17

교황권의 강화와 성직자 서임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총대주교가 위치하고 주변 지역을 통할하는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들 지역의 주교는 다른 지역에 대해 우월함을 주장하고 자신들이 가진 위치의 고결함을 주장하였다. 이 지역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다. 이들 지역은 전통적으로 번영하는 대도시가 위치하고 주변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곳이다. 이중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곳이 바로 로마다. 애초에 로마 제국은 로마가 수도였으니 말이다. 이후 로마 제국이 분열하면서 서로마는 밀라노,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로 수도가 나뉘지만 처음 로마 제국이 기원한 곳은 로마였다. 여기에 사도들 중에서 으뜸가는 지위를 차지했던 베드로가 로마 주교였던 점도 로마에 있는 성직자의 위치를 높여주는 요소가 되었다...

역사 2021.05.17

로마와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세력을 몰아내고 중, 남부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뤄낸 로마에게 다음 적은 카르타고였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 칸나이, 자마 전투뿐 아니라 전쟁을 이끈 한니발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는 명장들의 이야기, 한니발가 알프스 산맥을 넘은 사건 등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고대 전쟁이다. 로마는 라틴인으로 구성된 국가로, 공화정체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를 다스리고 있었다. 로마는 비교적 다른 동맹을 맺은 시와 관계를 좋게 맺은 편이어서 그들의 처우는 다른 국가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 이때문에 로마가 참여한 전쟁이 장기전으로 향해도 비교적 동맹들의 이반이 적은 편이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국가의 후계이다. 페니키아인들은 원래 레반트 일대의 도시를 기반..

역사/로마사 2021.05.08

중세의 화폐

중세 유럽 사람들은 오늘날 처럼 종이로 만들어진 화폐가 아니라 금속으로 만들어진 금속 화폐를 썼다. 고대에 비해서 중세의 화폐는 그 유통량이 적었다. 고대 로마제국은 화폐를 주조하고 다양한 지역에서 이를 통용시켰으나, 이후 중세 봉건제 사회에서 화폐는 고대 로마시대 만큼의 유통량을 가지지 못하였다. 중세 봉건제를 구성하는 다양한 국가, 도시들은 저마다의 화페를 만들어서 찍어냈다. 거대한 단일한 통화가 아닌 여러 소규모 통화가 쓰이니 통화 사용이 더 쉽지 않아졌다. 경제 활동의 부족, 자원의 부족 등의 이유로 인하여 모든 국가들이 화폐를 계속 찍어낼 상황이 아니었고 일부 국가들은 화폐 생산을 중단하게 된다. 중세에 주로 찍어냈던 돈은 은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값어치가 적은 화폐의 경우 구리로 만들어지는 경..

역사 2021.05.06

유스티니아누스와 동로마 확장 문제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는 하나된 로마 제국의 회복을 꿈꾸었고 그럴듯한 계획을 가졌던 마지막 비잔틴 황제다. 그는 벨리사리우스, 환관 출신의 나르세스 등의 장군의 도움에 힘입어 이민족과 싸웠다. 그의 치세 하에 비잔틴 제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하였으나 이는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고 나중에는 결국 지키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말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남부 히스파니아에 병력을 보내서 다스렸다. 그런데 이 지역들은 콘스탄티노플과 매우 멀리 떨어져 있을 뿐더러 참으로 방어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가장 서쪽에 있는 남부 히스파니아는 주변 지역 없이 그 지역만 다스려서는 다른 이민족들의 침공을 막기가 어려운 장소였다. 해군으로만 방어가 되는 지역도 아니었다. 아프리카 역시 비자틴 제국이 잘 나갈때..

역사/로마사 20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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