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세의 대학들 / 중세의 두려움 / 기사와 십자군

삼긱감밥 2021. 5. 23.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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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대학

 

중세 유럽에는 학문 연구의 기능을 담당하는 대학이 있어서 학생들이 교수에게 수업을 받았다. 이 대학들은 오늘날의 대학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기관이었으나 몇몇 특징은 오늘날과 비슷하다. 

 

대학에서는 법학, 의학, 신학을 주로 배웠다. 이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법학이나 의학이었고, 신학은 따기 어려운 조건들이 많은 데다가 워낙 수학 기간도 길어서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분야였다. 때문에 중세에도 사람들이 신학은 잘 배우지 않고 돈벌이에 좋은 법학이나 의학만 한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법학은 로마법이나 교회법을 배워서 관리가 되는 도구로 쓰였다. 어느 쪽이든 체제 유지에 필요한 기능이었고, 영국의 경우 중급 관리들이 법을 배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의학의 경우 오늘날의 수준높은 과학기술이 없었으므로 실험이나 학문의 상태가 오늘과는 달랐지만, 의사가 되는 길이었으므로 인기가 있었다. 신학은 오랜 세월 공부하고 나면 교회에 몸담게 되었다.

 

교수와 학생들은 삭발을 하였고, 세속 제후로부터 많은 특권을 받았다. 특히 문제나 갈등이 발생하였을 때 사법적인 조치를 받지 않는 것이 엄청난 특권이었다. 학교 인근에서 일어난 일은 자체적으로 해결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교수의 월급을 주는 존재였기에 오늘날의 학생과는 다르게 엄청난 영향력이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형태로 일이 추진되지 않으면 목소리를 내거나 심하면 폭력도 불사했다. 교수들은 대학이 있는 도시를 떠나기 전에 보고해야 했고, 수업을 지나치게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학생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돈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본이 되는 편지를 공부하여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가족, 친척이나 후원자들에게 돈을 우려낼까를 고민하였다. 그리고 몹시 폭력적인 경우가 있었다. 중세가 무력이 앞서는 시대였으므로 학생들이 폭력적인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대학을 둘러싼 시설에서 폭력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대학의 학생들이 특권을 받은 존재들이었고, 이로 인해 학생인 체 가장하고 신분을 숨기려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는 있다. 어쨌든 이런 학생들이 부딪치면서 대학을 연구하는 곳이 중세의 대학이었다.

 

중세의 두려움

 

중세 유럽인들은 다양한 것을 두려워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식량이 풍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굶주림을 두려워했다. 식량 생산이 풍족하고 모두가 일거리를 찾아서 지내는 상황은 오지 않았다. 농촌을 떠나서 도시로 갔으나 도시에서 적절한 일거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빈민이 되어 내몰려야 했다. 

 

또한 중세 사람들은 질병을 두려워해야 했다. 중세에 들이닥친 흑사병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단기간에 앗아갔다. 삽시간에 3분의 1이 사망하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중세 사람들은 평소에 영양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면역력이 좋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문화가 음울하고 절망적으인 색채를 보였으며, 질병이나 죽음이 그림에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흑사병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의 옷을 가지고 책을 만드는 일이 많아 도서 산업이 발전했지만 이런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자와 다른 사람들에 배타적이었다. 그들은 평생 자신의 장원에서 살다가 죽는 경우가 흔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는 세계와 다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세의 사람들은 가족단위로 살았으므로, 혼자 사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으며 특히 혼자 사는 여성의 경우 공공연한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기사와 십자군

 

중세의 기사들은 매우 폭력적이고 자신들의 전투를 장기로 삼는 이들이었으므로, 다른 이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기사들의 폭력성을 어느정도 진졍시켜보고자 교회는 다양한 대책을 강구했으나 기사들이 폭력적인 정도가교회는 기사가 최대한 다른 기독교도 이웃을 공격하는 대신 다른 종교의 이교도와 싸우도록 선회하도록 유도했다.

 

십자군도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이는 동로마 제국의 요청을 교황이 지원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다양한 유럽의 제후들이 예루살렘을 향하게 만들었다. 주된 원동력은 종교적 열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순례를 하거나 기사로 활동하기 위해서 머나먼 땅까지 떠났다.

 

십자군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교황은 애초에 어느정도 규율을 유지할 급이 되는 제후들이 십자군을 가길 바랬지만 빈한하고 어려운 평민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도 십자군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은 가는 길에 유대인 지역을 거주해서 살해하거나, 약탈을 벌이는 군율이 없는 이들이었다. 기껏 이슬람 제후가 있는 지역에 도착해서도 훈련이 되어있지않아 삽시간에 전멸하곤 했다.

 

제후들도 저마다의 목표가 다르고 자신의 영지를 세우는 것을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비잔틴 제국은 야심찬 제후들의 십자군을 경계하였고 십자군 세력에 대해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십자군 세력들은 육로, 해로, 육로와 해로를 섞는 다양한 방법으로 예루살렘을 향했는데, 이 와중에 병력이 소모되어 전투를 치뤄보기 전에 약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십자군 당시 시리아 인근의 이슬람 제후들도 각기의 이유로 분열되어 있었다. 때문에 십자군 세력들은 그들을 몰아내고 각지에 기독교 왕국을 성립한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가 정치적으로 단결하여 기독교 국가를 적대하자 버틸 힘이 별로 없었다.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 장군으로 살라딘이 유명하다. 그는 십자군의 핵심 전투력인 기사단원들을 제외하고는 주민들에게 관대한 조치를 베풀며 관용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를 제외한 다른 제후들은 이슬람 세력의 공세에 큰 방어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허무하게 끝난 십자군이 많았다. 이집트나 튀니지에 대한 십자군도 있었으나 그다지 성공스럽지 않았다.

 

십자군으로 인해 많은 이득을 본 것은 이탈리아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병력을 수송하고 십자군 왕국과 무역의 길을 터서 많은 이익을 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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