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봉건제와 프랑크 왕국

삼긱감밥 2021. 5. 23.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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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은 내외부의 문제로 점점 약해졌다. 제국의 관료제는 점점 더 유지하기 힘들어졌고 지켜야 할 국경은 많았다. 이런 와중에 게르만족이 로마 내부에 침입하자 로마의 영역 자체가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프랑크족,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등은 각기 로마 내부에 침입해서 자신만의 영토를 확보했다. 

 

서고트족은 히스파니아, 동고트족은 이탈리아,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자신들의 입지를 마련했다. 프랑크족은 자신들의 원래 거점인 라인강 인근에서 로마 내부로 들어왔는데, 서고트족 처럼 거주지를 깡그리 이전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기존의 영토를 버리지 않았다. 

 

서고트족은 훗날 이슬람에 무너져 아스투리아스 왕국만을 남기고 멸망했다. 반달족은 동로마 제국의 침공을 당해 망하고 말았다. 동고트족 역시 동로마 제국과의 치열한 전투 때문에 쇠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프랑크족은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인근에 해당하는 자신들의 영토를 유지했고, 로마의 유산을 흡수하여 강력한 왕국으로 발돋움했다. 또한 그들은 교황과 원활한 관계를 수립했으며 이슬람 세력을 격퇴했다. 

 

동로마 제국은 그리스 정교와 황제 체제를 유지하며 서유럽과 다른 길로 나아갔다. 서유럽에서는 봉건제가 자리잡았다. 봉건제는 주군은 제후들에게 봉토를 수여하고, 제후들은 자신들이 봉토를 받은 대가로 군역의 의무를 쌍무적 계약 관계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왕국이 가지는 힘은 훗날의 국가와 달리 매우 한정적이었다. 왕국의 군주는 주로 세입에 관련해서 자신의 왕령지에 의존하여야 했다. 이 말은 강한 힘을 가진 거대 제후가 부나 영향력에 있어 왕을 능가할 수 있다는 말도 되었다. 

 

봉건제의 기원과 관련하여, 게르만족의 전사들이 부족장을 따르는 종사제와 로마의 군역을 치르는 대가로 땅을 받는 개념이 합쳐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제후들은 왕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명분상으로는 맞았다. 하지만 제후들은 자신들의 힘을 믿고 다양한 방식으로 왕권에 저항하거나 도움을 주지 않으려 했다. 왕이 잘 되어봐야 제후만 손해인 구조였다. 물론 그런 제후들도 자기보다 작은 자신을 섬기는 제후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세습하는 자리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당대의 제후들은 특정 기간동안에만 군역을 지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여 일정 기간동안에만 전투를 하다가 돌아가는가 하면, 바다 건너 전투하는 것은 자신들의 의무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유럽의 봉건제 하에서, 농노들은 영주를 위해 밭을 갈고 노역을 부담해야 했다. 영주들과 일반 농노들은 양에서는 차이가 났지만 질에서는 차이가 나지 않는 삶을 살았다. 영주들이 농노보다 더 잘먹고 더 잘쓰고 살았지만 물건들의 양이 달랐던 것이지 고급진 것을 먹으며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영주의 성이 겨울에는 중세 농노의 성보다 더 안 좋았을 확률도 있었다. 목재 성에서는 불을 피울 수 없었고 석재 성에서는 불을 잘 빠져나가게 연기를 잘 빠져나가게 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농민들은 돼지를 껴안고 잤다.

 

프랑크 왕국은 훗날 왕위 계승을 두고 분열하여 서프랑크와 동프랑크로 분열하였다. 서프랑크는 프랑스, 동프랑크는 독일로 발전하게 된다.

 

프랑스의 경우, 파리를 비롯한 일드프랑스 지역을 에워싸고 있는 제후들의 세력이 너무나 커서 프랑스 왕의 힘이 몹시 미약하였다. 그들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왕령지를 늘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프랑스 왕은 플랜더스 백작가와 혼인을 이어서 그들의 영토를 상속하거나, 영국의 노르망디를 빼앗거나, 알비 십자군 이후에 남부의 제후와 혼인하여 영토를 상속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왕령지를 늘려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프랑스에서 카페 왕조를 연 위그 카페는 계략이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그와 그 후손들의 초기 영토는 일 드 프랑스 인근에만 머물렀다. 이렇게 작은 영토로는 인근의 대영주들인 공작들의 세력을 견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일드프랑스 이외 지역에서 공작들은 자기 마음대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다가 프랑스 왕이 플랜더스 백작과 친척이 된 후에 그의 죽음으로 플랜더스 백작령을 잇고 프랑스 북부 땅을 얻었다. 거기에 더해 노르망디를 얻음으로써 프랑스 왕의 힘도 강해질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프랑스 왕의 권력이 강해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프랑스 왕가도 다른 왕가와 마찬가지로 자식들에게 영토를 나눠주려고 했다. 때문에 장남이 아닌 아들들도 왕령지의 영토를 분봉받아서 제후가 되었다. 이들은 처음 임명되었을 때는 왕가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세대가 지날수록 왕가와 혈연 관계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 왕가에 불충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렇다면 왜 멍청하게 이런 식으로 왕령지를 왕자들에게 주었나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왕령지가 거대해지면 통치하기 어려운 것이 당대의 현실이었기 때문에 왕으로서는 그나마 믿을만하고 자신의 피가 섞인 왕자들에게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러한 조치는 단기적으로는 왕의 친위 세력들을 배치하여 왕권에 부담이 되지 않았으나 장기적으로 보면 말 안듣는 제후를 양산하여 왕권을 약화시켰다.

 

동프랑크왕국이 자리잡은 독일의 경우, 프랑스에 비해 확립된 왕권을 자리잡도록 하는데 실패했다. 간혹 카리스마적인 군주가 등장하여 자신의 힘을 내보이고 왕권을 강화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제후들은 왕권이 강화되는 것을 매우 증오하여 교황이나 다른 국가의 왕과 동맹했다. 

 

황제들이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와 남부의 시칠리아 등에 신경쓰는 동안, 제후들은 자신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국 독일에는 세습되는 왕조가 자리잡지 못하고 선거에 의한 선출이 일반적인 형태로 자리잡게 된다. 이 점이 카페 왕조의 프랑스와 달랐다.

 

영국에는 앵글로 색슨족이 노르만인들의 침공을 받았다. 스칸디나비아 바이킹들은 기존 영국에 있던 앵글로 색슨 족에 큰 위협이었다. 그들은 노르망디에서 북쪽으로 영국을 치기도 했고 노르웨이나 덴마크에서 바다를 건너와서 영국을 치기도 했다. 어쨌든 앵글로 색슨 족들은 이에 시달리다가 노르망디 공작의 침공을 받아 패망하고 말았다.

 

노르만 인들이 잉글랜드를 차지한 이후 그들은 강한 왕권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들은 주교와도 싸웠다.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변경은 제후들에게 맡기고 나머지 지역에서 앙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들은 특히 법정을 이용해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법권을 활용하여 재판에서 무는 벌금을 왕이 가져가는 방식으로 돈을 벌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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