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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시리즈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만화시리즈는 시사만화가였던 박시백 화백이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 그린 만화이다. 태조실록부터 망국까지 총 20권으로 이루어져있으며, 각 권은 한 군주의 이야기를 담은 경우가 많으나 기록이 부족하거나 재위기간이 짧은 임금은 합쳐서 한 권으로 구성했다. (예를 들면 헌종 철종실록으로 1권을 만든다던가) 대부분의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반하기 때문에 실록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 예를 들면 실학과 같은 주변부 이야기는 담겨져 있지 않다. 실록에 기반하여 서술하나 일부 수정실록이나 사관의 객관성에 의심이 가는 경우에는 조정하거나 작가 본인의 내용을 일부 반영하기도 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졌으나 역사적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내용을 할애하여 반박하기도 한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망국

교주 최제우와 최시형의 노력으로 지방에 많이 퍼져있던 종교가 바로 동학이다. 민씨 일가의 탐욕과 조병갑을 비롯한 탐관오리들의 악정으로 동학의 조직을 빌어 농민봉기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이다. 비록 동학의 조직을 빌렸지만 주체는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반봉건을 내세워 조직적 봉기를 일으켰고 나름의 성과를 거둬 전라도 일대에서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실시한다. 일본은 그동안의 군사증강을 믿고 청일전쟁을 기획한다. 평양의 청군과 전라도의 동학군이 일본군에 맞서는 전략도 기획되나 각개격파되고 청에 대한 일본의 우세가 확인된다.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민비는 러시아와 손을 잡는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칭제하여 대한제국을 세우고, 자강의 노력을 시도한다. 민간에서는 독립협회가 결성되나 앞으로의 방..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고종실록

앞서 철종이 자식없이 사망했기에, 뒤를 이을 사람을 조금 먼 종친중에서도 뽑아야하는 상황이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조심히 처신하며 때를 보아 조 대비와 손을 잡는다. 조 대비는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을 왕으로 삼고, 이하응과 권력을 조율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는 적절하게 성공하여 고종보다 더 철종과 가까운 종친들이 있었음에도 고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한다. 고종이 어렸기에 조대비는 흥선대원군과 정치를 한 뒤 고종이 나이가 든 이후에는 일선에서 물러난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게되자 매우 정력적으로 개혁에 나섰다. 그는 사대부세력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만동묘와 서원을 혁파하고, 호포법을 실시하여 군포를 부과함으로써 재정개혁에 나섰다. 사대부들이 모두 반대하여 숙종때부터 수십년 수백년동안 지지부진하던 것들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8 헌종 철종 실록

이미 순조시대에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된 상황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순조시기에는 적어도 김조순이라는 한 명의 정점에 이른 권력자가 뒤에서 은밀하게 암약했지만, 헌종 철종시기에는 그냥 대부분의 안동김씨들이 권력에 포진하여 전면에서 권력을 행사한다. 이를 반남박씨와 풍양조씨가 보좌하는 모양세를 취한다. 헌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에, 순조비에 의한 수렴청정이 실시된다. 수렴청정기간 동안 삼정의 문란을 해소하고 수령의 비리를 줄이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이미 외척인 안동김씨에게 모든 권력이 있다 보니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안동김씨들이 비리를 벌이고 있는데 막을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헌종은 수렴청정이 끝나고 친정을 하게 되자 직접 자신만의 정치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7 순조실록

17권은 순조실록이다. 이전에 정조가 죽었을 당시 순조의 나이가 많지 않았기에 정순왕후에 의한 수렴청정이 이루어진다. 세간에는 정순왕후가 노론 벽파의 수장으로 정조의 개혁을 다 짓밟아놓고 순조 이후의 정치를 벽파 위주로 몰아쳤으며 조선사회를 퇴보시킨 악녀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렇게 보면 정조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정순왕후가 벽파를 끌고 파괴한 셈이 된다. 그러나 박시백 화백은 이런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본다. 그는 정순왕후가 권력욕도 꽤 있었고 정치에 관심도 많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가 시파를 다 쓸어서 없앴다고 보기 어렵고(오히려 이후 시파에 의해 벽파가 파멸한다), 나름의 명분에 입각하여 정치를 시행했으며 순조가 나이가 들자(약간의 갈등이 있었지만) 수렴청정을 그만두었기에 악평이 과장된 것은 아닌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6 정조실록

영조가 죽고, 아들인 사도세도가 죽었으므로 세손인 정조가 즉위했다. 정조는 외척인 홍씨일가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기에 정후겸과 홍인한 등은 별의별 수를 써서 정조를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정조는 홍씨 일가를 등용하는 대신 노론 강경파 김준수를 등용하고, 소론 서명선과 남인 채제공을 통해 균형을 맞춘다. 채제공의 등장은 매우 위협적이었기에 소론과 노론은 손을 잡아 남인을 공격하기도 하고 기독교 박해를 일으키려 시도도 해봤지만 정조는 유교를 바로 하면 기독교 신앙은 사라질 것이라고 치부한다. 덕분에 남인들 상당수가 기독교를 믿었지만 즉시 처형당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로 이가환 등. 정조는 준론 탕평을 이루어서, 영조가 탕평에 우호적인 노론과 소론을 통해 기계적 탕평을 이룬 것과 달리 강경파들도 고루 등용..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5 경종 영조실록

숙종이 죽고 세자가 즉위하니 바로 경종이다. 노론 대신들은 왕위를 제외한 모든 권력의 요지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경종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또한 연잉군을 세제로 임명할 것을 강하게 권하고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는 등 기세등등했다. 경종은 유약하고 별 관심 없이 조용히 말을 받아들이니 이대로 노론의 시대가 오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노론측의 요구를 잘 받아들이는 듯 했던 경종이 노론 4대신을 쫓아내고 소론들을 등용한다. 사실 그동안 경종이 노론들 앞에서 고분고분한 척 했던 것은 모두 연기였던 것이다. 경종은 노론의 주장에 반대했으면서도 참다가 기습한 것이다. 연잉군은 자신에게 위기가 닥쳐왔음을 느끼고 정치적 액션으로 정면돌파에 나서서 한번은 성공한다. 다행히 경종은 별다른 후사가 없었다. 이런..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 14 숙종실록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왕이었다. 숙종은 앞서 아버지 현종이 예송논쟁 뒤집기로 노론 견제의 틀을 만들어 놓은 것을 이용하여 노론을 제압하고, 그 외 세력들을 적절히 바꿔가며 왕권강화의 틀을 갖춘다. 그런데 이때 발생한 왕권강화가 다른 시기에 비하여 특이한 점은 바로 환국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특별한 원칙없이 어느날 갑자기 숙종의 의도에 따라 환국이 이루어지면 이전에 재임하던 정승 판서들은 모두 귀양을 가고 그들의 스승이나 학문적 계보에 있는 사람들은 비판받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니 노론도 소론도 많은 사람들이 죽고 쫓겨나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왕은 이 불안한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이를 통해 숙종은 왕권강화에 성공했다. 장희빈과 인현왕후, 숙빈최씨의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3 효종 현종 실록

박시백 화백은 효종을 현실적 개혁군주라고 본다. 그는 효종이 진짜로 청나라에 대한 북벌을 주장했을거라고 보지 않는다. 송시열이 훗날 주장한 효종과의 독대도 후일에는 송시열에 의해 송시열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이용되지만 사실은 효종이 송시열과 산당세력에 의해 정당성을 이용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효종이 북벌을 준비했고 이를 위해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은 거짓이 된다. 박시백 화백이 보는 효종의 두가지 요소는 정당성 컴플렉스와 개혁이다. 우선 효종은 다른 왕들에 비해 큰 정당성의 흠이 있었는데, 소현세자가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도 기묘한 죽음을 맞은데다가 그 소현세자의 아들들도 있었기에 효종의 입지가 안정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정당성을 안정적으로 구축하기 위해서 효종은 사대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인조실록

이번 12권은 인조실록이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정권을 탈취했다는 면에서 어쩌다 옹립된 중종과는 다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세조나 태종처럼 적극적인 리더로 활동한 것은 또 아니라 권력이 탄탄하지 못한 채로 왕이 되었다. 반정을 이끈 총사령관같은 존재라기 보다는 one of them이었던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인조에게는 인재도 부족했다. 인조의 집권을 도운 서인 세력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어쩌다 지방관을 한 사람이나 있을까말까한 정도였다. 때문에 인조는 오랜 경험과 숙련을 바탕으로 정책을 집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조 정권의 축이었던 이귀와 김류는 리더로서 식견을 제시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최명길에 의하면 이귀는 큰 계획은 그리지만 구체적 대안이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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