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2 인조실록

삼긱감밥 2021. 6. 10.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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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12권은 인조실록이다. 인조는 반정을 통해 정권을 탈취했다는 면에서 어쩌다 옹립된 중종과는 다른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세조나 태종처럼 적극적인 리더로 활동한 것은 또 아니라 권력이 탄탄하지 못한 채로 왕이 되었다. 반정을 이끈 총사령관같은 존재라기 보다는 one of them이었던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인조에게는 인재도 부족했다. 인조의 집권을 도운 서인 세력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벼슬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고 어쩌다 지방관을 한 사람이나 있을까말까한 정도였다. 때문에 인조는 오랜 경험과 숙련을 바탕으로 정책을 집행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인조 정권의 축이었던 이귀와 김류는 리더로서 식견을 제시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는데, 최명길에 의하면 이귀는 큰 계획은 그리지만 구체적 대안이 없고 김류는 별다른 큰 식견은 없는 사람이었다. 이 책에 나온 이귀는 꽤 현실적인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최명길과 함께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주장하는 모습도 보이나 오래 살지 못했고 다른 사람과 불화가 심했다. 김류같은 사람은 최명길의 평이 사실이면 거물로서 정권의 축이 되기엔 민망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마저 인조에게 별로 긍정적이지 않았다. 잘 있는 임금은 어디가고 인조가 들어왔냐는 식으로 별로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북방의 후금은 점점 힘을 키워 명나라와 힘을 겨루게 된다. 광해군은 앞서 급변하는 외교정세를 살피며 현실적인 정책을 시도했지만 인조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인조와 서인들은 눈치를 보는듯 마는듯하다가 결국 침공을 당해 정묘호란을 겪게 된다. 다행히 많은 군대가 쳐들어온 것은 아니었기에 적당히 형제관계를 맺는 선에서 막을 수 있었다.

 

명나라는 요새와 명장의 도움으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재건할 수는 없었다. 결국 후금은 청으로 국호를 바꿨고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몽골도 병탄하기에 이른다. 조선이 청을 상대하기는 사실상 역부족인 상태였지만 대부분의 대간들이나 사대부들은 명분론을 앞세워 명나라와 연락하고 청나라를 적대하기를 계속했다.

 

결국 청이 쳐들어오니 병자호란이 터진다. 도원수 김자점은 이를 막지 못했고 신료들은 남한산성으로 옮기나 날씨는 진눈깨비가 쏟아지고 식량마저 부족한 상황이었다. 청군이 강화도에 오지 않을 것이라 믿고 개판으로 방어하던 강화도는 청군에 함락당하고 말았다.

 

삼학사등 척화파대신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명분을 중시했으나 최명길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인조는 나아가 항복한다. 어떻게든 왕이 성에서 나가지 않게 하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청의 군주도 조선에 있는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했고 결국 인조도 밖에 나와서 삼궤구고두례를 행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볼모로 잡혀간다. 삼학사 역시 끌려갔고 김상헌은 가족들이 있는 방안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실패한다.

 

이후 최명길과 장군 임경업이 몰래 명나라와 연락을 시도한 것이 들켜서 최명길은 청나라에 소환되고 임경업은 명나라로 간다. 임경업도 명나라의 몰락은 막진 못했고 결국 조선으로 돌아와서 역모사건과 관련하여 매를 맞다가 죽는다. 최명길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청나라에 가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응대하여 죽음을 면한다.

호란후 인조는 김자점을 중용하며 정권을 유지한다. 전쟁 후유증으로 백성들은 청나라에 끌려갔고 환향녀들의 귀환으로 사회문제가 발생하는 상황이었으나 사대부들은 성리학 교조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며 보수화된다.

 

소현세자가 죽고 봉림대군이 효종이 된 과정에 관해 흔히 하는 이야기로 소현세자는 친청파, 봉림대군은 반청파라서 살아남은 것은 아닌가 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소현세자가 제거된 것은 궁극적으로는 그가 왕권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전쟁 이후 권력에 몹시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소현세자가 개고생하고 청국에서 돌아왔음에도 그를 환대하지 않았고 세자빈 강씨에 대한 인조의 처우는 매우 박해 개의 자식같다고 욕설을 한 것이 기록에 남을 정도였다. 이후 소현세자는 죽음을 맞는다.

 

인조와 사대부들은 유교적 명분론에 집중했고 비참한 세태를 보면 보면 눈물흘릴줄은 알았으나 특별한 대책을 내놓지도 않았고 내놓으려고 노력한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기묘하게도 효종대에 인조는 어질 인 仁이라는 좋은 묘호를 받는다. 너무 좋은 묘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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