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교황권의 강화와 성직자 서임

삼긱감밥 2021. 5. 17.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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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총대주교가 위치하고 주변 지역을 통할하는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들 지역의 주교는 다른 지역에 대해 우월함을 주장하고 자신들이 가진 위치의 고결함을 주장하였다. 이 지역은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다. 이들 지역은 전통적으로 번영하는 대도시가 위치하고 주변 지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곳이다.

 

이중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곳이 바로 로마다. 애초에 로마 제국은 로마가 수도였으니 말이다. 이후 로마 제국이 분열하면서 서로마는 밀라노, 동로마는 콘스탄티노플로 수도가 나뉘지만 처음 로마 제국이 기원한 곳은 로마였다. 여기에 사도들 중에서 으뜸가는 지위를 차지했던 베드로가 로마 주교였던 점도 로마에 있는 성직자의 위치를 높여주는 요소가 되었다. 때문에 로마 주교는 자신들이 다른 모든 교회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가 망한 후에 실질적인 로마 주교의 위치는 형편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지역의 주교는 모두 동로마 제국에 속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수도이니 당연히 안전한 곳이었다. 제4차 십자군 전후나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멸망 즈음을 제외하곤 난공불락인 도시였다.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이집트는 동로마제국의 지배 하에서 어느정도 안전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이들 지역은 페르시아의 위협을 받았고 훗날 이슬람에 의해서 이 지역들이 점령당하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로마가 분열되고 서로마가 망할 무렵 까지는 이탈리아처럼 혼란한 지역은 아니었다. 

 

반면 틈만 나면 이탈리아에 게르만 족이 쳐들어와서 개판이 되는 상황에서 로마 주교라고 뭐 뾰족한 수가 있을 수가 없었다. 한때 야만족과의 협상을 맡거나 로마를 위해 행정 체계를 이끄는 등의 역할을 한 교황도 있었지만 결국 로마 주교의 권위는 쇠락하였다. 로마 주교를 뽑는 선출은 몹시 혼란스러웠고, 이들의 권위는 교회의 수장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그러다가 교황의 지위를 확립할 만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프랑크 왕국과 로마 교황이 손을 잡은 것이다. 교황은 클로비스에게 대관을 씌워줌으로써 왕을 축복하는 사제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또한 신하가 왕을 내쫓고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신하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 찬탈을 지지함으로써 그들의 보호를 얻을 수 있었다. 

 

동로마에서는 주교들이 치열한 이념 대립을 전개하였다. 이집트의 도시 알렉산드리아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단성론을 지지하여 다른 지역과 갈등을 빚었다. 단성론을 둘러싼 문제는 동로마 제국을 여러 혼란으로 이끌었다. 또한 콘스탄티노플 주교도 황제에게 대항하거나 나름의 학설에 기반하여 반대 의견을 주장하곤 하였다.

 

하지만 어쨌든 동로마 제국에서 종교와 정치를 둘러싼 가장 최고위 권위를 가진 사람은 황제였다. 때문에 다양한 혼란도 끝내는 황제가 마음먹고 정한 방향으로 흐르는 수가 많았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교황과 세속 군주간의 구분이 이루어졌고, 각 유럽의 지방에 위치한 주교와 교황이 세속 제후들과 구분되었다. 각 지역의 주교들은 제후들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여러 제후를 상대하느니 차라리 하나의 왕이 있는 것이 낫다고 여겨, 왕권의 성립과 강화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교황들은 수 세기에 걸쳐 혼란이 접어들자 행정 체계를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그들은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면으로 노력하였다. 명목상의 봉토를 수여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돈을 받기도 했다. 힘이 성장한 교황들은 성직자의 서임을 둘러싸고 세속 제후에게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성직자 서임권 투쟁은 주로 신성로마제국 지역, 즉 독일을 향하였다. 영국에서는 왕권이 강하게 성립되어 있어서 이에 대해 교황이 따져도 딱히 얻을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노르만인들이 영국을 침공하고 강력한 왕권을 성립, 왕에게 대항할 만한 세력 형성이 어려웠던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카페 왕조의 힘이 너무 약해서 굳이 프랑스 거대 귀족들이 왕에 대해 싸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다. 프랑스 왕은 파리와 인근 일드 프랑스 지역만 다스리는 수준이었고 거대 귀족들은 말을 안 들었다. 이후 프랑스 왕의 힘은 직영지가 늘어나면서 강해졌는데, 플랜더스 백이 죽고 그 유산을 상속하면서 커진 것이라 귀족간의 갈등과는 상관이 없었다. 

 

반면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여러 공들이 자신의 지역을 지키고 황제에 대항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투쟁을 벌였다. 귀족들의 지지로 황제가 되는 상황에서 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있었던 황제가 되기 위한 전쟁에서 교황과 영국은 각자 특정 가문을 지원하는 식으로 개입하였다. 때문에 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혼란이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패자가 외국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와서 내분을 일으켰던 것이다. 

 

교황 입장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이 다른 영국, 프랑스보다 만만한 상대였다. 황제를 둘러싸고 힘을 합쳐 싸울 귀족 세력이 많았기 때문이다. 남쪽의 시칠리아는 무슬림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정복된 땅으로 시칠리아 왕이 자유롭게 성직자 서임을 하였다. 그러니 성직자 서임 투쟁은 대상이 독일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성직자의 서임권을 두고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의 갈등이 잦았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성직자를 마음대로 왕이 임명하는 것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성직자 자리를 돈받고 팔아먹었다. 교황은 황제에 반대하는 귀족들과 한편이 된 것처럼 황제를 공격하였으나, 카노사의 굴욕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제국 귀족들이 로마 교황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황제와의 싸움에서 공방을 거듭하였다. 

 

이 갈등은 양쪽이 서로 타협하면서 봉합되었다. 황제 측은 황제가 신의 대리인이란 주장을 거두고, 무자격자를 성직자에 덜 임명하게 되었다. 대신 황제가 성직자에 대한 거부권은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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