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프랑스 혁명

삼긱감밥 2020. 12. 7.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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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제1조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서 살아간다. 사회적 차별은 오로지 공공 이익에 근거할 경우에만 허용될 수 있다.”

-프랑스 인권선언 제 1조

 

18세기 후반 프랑스는 막대한 부채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전에 신교를 믿는 위그노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함으로써 그들의 기술이나 자본력이 외국으로 이동하기도 했고, 다양한 전쟁 조달 자금을 빚으로 돌려 막다보니 국가 재정에 한계가 온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의 독립 전쟁을 지원하였는데, 이것에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내에서 대부분의 재산을 가지고 있던 귀족과 성직자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조세를 부담하는 것은 귀족과 성직자에 속하지 않는 제3신분들이었다.이로인해 도시민들과 대다수 평민사이에서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증하게 되었다.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1789년 삼부회가 열렸지만 삼부회의 투표 집계방식과 관련하여 갈등이 지속된다. 특권층은 자신의 표가 과다 대표되는 혜택을 줄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제3신분인 의원과 일부 귀족, 성직자가 가세하여 국민 의회의 개회를 선포하고 헌법 제정까지 물러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테니스 코트의 선언이다. 제3신분의 분노가 위험수위까지 올라오자 프랑스 왕 루이 16세는 군대를 배치하나 이것이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어 분노한 군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파리는 혼란에 빠진다.

 

이후 의회 측이 권력을 잡게 되어 일련의 제도 정비 작업에 착수한다. 라파예트의 주도로 프랑스 인권 선언이 채택된다. 루이16세와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를 탈출하기 위해 도망치려다 바렌느에서 체포된다. 이것이 왕가에 대한 여론을 매우 악화시킨다. 프로이센군이 프랑스에 쳐들어오는 등 위기가 계속되나 가까스로 격퇴한다. 이후 새로 의회가 구성되었고 의회는 부르주아를 대변했던 의회주주의자들인 지롱드파와 농민과 소상공업자를 대변했던 강경파 자코뱅파로 분열된다. 자코뱅파의 리더로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의 3거두가 있었다. 자코뱅파의 강경한 주장으로 결국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다.

 

이후 지롱드파는 자코뱅파의 연이은 공격에 힘을 잃었고, 자코뱅파가 권력을 잡게 된다. 그러나 각지에 산재한 지롱드파와 왕당파 세력과 갈등하게 된다. 자코뱅파들은 반혁명 세력을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공포정치를 시작해 수많은 사람을 처형한다. 사법절차를 간소화한 프레리알 법으로 처형은 가속화된다. 공포정치의 상징적 인물이 로베스피에르로, 그는 마라가 암살당한 이후 당통을 정치적으로 실각시키고 실질적인 공안위원회의 리더가 된다. 혁명은 서로간의 살육전으로 인해 극단으로 치달았다. 반혁명을 진압하자는 명분으로 수많은 처형이 이루어졌고 이 와중에 과학자 라부아지에도 징세청부업자였기에 사형당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도 경제 상황을 호전시키는데 실패했고, 공안통치에 겁먹은 이들이 반동을 일으키면서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 역시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이후 성립된 의회는 왕당파와 외국의 공격을 받으면서 혼란에 빠진다. 이런 혼란 끝에 결국 군인이었던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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