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역사 45

소련의 붕괴

“나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치뤘다.“ -고르바초프 소련은 자본주의 진영에 있어서 아주 무섭고도 강력한 적이었다. 소련은 뒤늦게 시작한 핵개발 분야에서 미국을 따라오는가 하면, 우주 개발 경쟁에서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초로 우주 비행사를 직접 우주로 보내는 등(1961, 유리 가가린) 군사적, 정치적으로 항상 서방 세계를 위협해 왔다. 밖으로는 헝가리 의거(1956)와 프라하의 봄(1968)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의 개혁 시도는 군사력을 통해 좌절시켰다. 헝가리 의거를 진압하면서 헝가리 총리를 납치하여 이후에 죽였으며, 프라하의 봄 당시에는 소련의 판단에 따라 동유럽 국가들에게 군사적으로 간섭하겠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주장하여 개혁을 억압했다. 안으로는 언론 자유의 억압과 공산당 독..

역사 2020.12.06

비동맹 회의와 양자 대립의 완화

비동맹 회의와 양자 대립의 완화 ‘위기의 시기에는 가장 위험한 길이 가장 안전할 때도 있다.‘ -전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 1955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표들이 인도네시아 반둥에 모여서 식민주의의 배격을 논의한다. 반둥 회의는 인도네시아와 인도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후 1961년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비동맹 회의가 개최된다. 이 비동맹 회의에는 미국과 소련의 양대 진영에 가입하지 않고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는 국가들이 모였다. 공산 게릴라 출신이었지만 소련과 냉랭한 관계를 유지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이집트의 반식민주의자 나세르, 인도의 수상 네루 등이 주요 인사였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대표들이 많은 편이었다. 이들은 식민주의를 배격하고 약소국이 냉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역사 2020.12.06

냉전

“발트해의 슈테틴에서 아드리아해의 트리에스테에 이르기까지, 철의 장막 하나가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져 있습니다.” -처칠, 연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세계의 패권을 좌지우지하는 강대국으로 남은 것은 미국과 소련이었다. 이전의 열강이었던 추축국 국가들은 패전으로 붕괴했고, 승전국인 프랑스와 영국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전의 위세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중국과 인도는 식민지배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승전국인 연합국 중에서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가 패권국가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들이 바로 미국과 소련이었다. 미국은 자본주의, 소련은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했다. 미국은 실질적으로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으며 태평양과 유럽에서 양면전선을 유지하며 세계 곳..

역사 2020.12.06

남북전쟁

“분열된 집안은 살아남을 수 없다.“ -링컨, 연설에서 독립 이후 미국은 계속해서 산업 발전을 이어나갔으나, 남부와 북부의 분열과 대립 역시 싹트고 있었다. 북부는 산업과 경제가 발달한 공업 발달 지역이었고, 남부는 흑인 노예제를 운영했고 면화 농업이 한동안 주력이었던 공업 미발달 지역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차이 이외에도 북부와 남부 사이에는 흑인 인권을 바라보는 시선의 격차가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도 남부는 영국식 문화가 강한 편이었다.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갈등이 19세기 초반부터 부글부글 끓어올랐으나 1820년 위도 36도 30분선을 기준으로 북부는 노예제가 없는 자유주, 남부는 노예제도가 있는 노예주로 삼자는 미주리 협정이 체결되며 일단 갈등이 봉합된다. 그러나 이 갈등은 결국 언젠가 터질 운명이었고..

역사 2020.12.06

폴란드와 헝가리의 초기 역사

중세 동유럽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국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헝가리 왕국이었다. 폴란드는 10세기 무렵 슬라브족의 일파가 건국하였으며, 초기엔 피아스트 왕조가 다스렸다.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은 1386년에 이웃인 리투아니아의 야겔로 대공과 결혼한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를 따라 이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두 군주의 결합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강건한 유대를 유지하게 된다. 두 국가는 1410년 그룬발트(독일명: 탄넨베르크)에서 독일 기사단을 격파하고 동유럽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같은 군주를 공유하는 동군연합을 유지하는 한편 오스트리아의 견제를 받아가며 헝가리와 보헤미아에 야겔로 왕조의 군주를 파견하여 세력을 넓혔다. 1569년 루블린 조약으로 두 나라는 의회를 ..

역사 2020.12.06

30년 전쟁

현재 독일 땅에 위치했던 신성 로마 제국은 선거권을 가진 7명(훗날 계속 추가되어 늘어남)의 선제후가 제국을 다스릴 황제를 선출하는 투표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와 근세 대부분의 시기에 제국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한편,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제후들은 가톨릭을 신봉했고, 작센과 브란덴부르크를 비롯한 북부 독일 제후들은 루터의 교리를 따르는 개신교를 믿고 있었다. 이것이 갈등의 도화선이 되어 제국내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다가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에 의해 구교와 신교의 공존이 제안되어 갈등이 일단락된다. 그러나 아우구스부르크 화의에서 인정된 ‘신교’는 루터파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엄격하고 청빈한 삶의 실천과 구원은 예정되어있다는 예정설을 주장..

역사 2020.12.05

한나라의 멸망과 삼국시대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는 수백년에 걸치며 중국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나라 초기에는 각지에 왕이 봉하여진 봉건제의 요소가 있었지만, 성이 다른 왕들은 토사구팽당하여 점차 사라졌으며 황실과 성이 같은 유씨 제후들도 점차 땅을 빼앗기며 힘을 잃어갔다. 이리하여 법을 운용하지만 그 처벌은 진나라처럼 혹독하지 않은 한나라 고유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성립된다. 이 한나라는 중간에 잠깐 왕망의 신나라에 찬탈당하지만 곧 유씨 일족에 의해 복원된다. 왕망의 찬탈 이전의 한나라를 전한(기원전 206~기원전 6), 찬탈 이후 유방의 후손인 광무제 유수에 의해 재건국된 한나라를 후한(25~220)이라고 한다. 후한은 장자상속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중반기 이후에는 황제들이 단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황제를 대신..

역사 2020.12.05

진나라의 천하 통일

상앙은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들어가 그가 배운 술을 능히 펼칠 수 있어 진효공을 패자로 만들었음으로 후세 사람들이 그가 펼친 법술을 높였다. -사마천, 사기 태사공 자서 중국은 최초의 왕조인 주 왕조의 성립 이후 점차 분열되었다. 애당초 주 왕조는 혈연에 근거하여 성이 같은 일족을 제후로 대거 지방에 봉했는데, 수백년이 지나면서 이러한 혈연이 약해지게 되었다. 이후 주나라가 오랑캐의 침입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동쪽으로 천도하여 동주 시대가 열리자 각기에 국가들이 할거하면서 춘추시대(기원전 8세기~ 기원전 3세기)로 돌입한다. 춘추시대에는 제, 진, 초, 오, 월 등의 국가가 융성하여 중국의 맹주로 활동하면서 춘추 5패의 이름을 얻는다. 춘추 5패는 사료마다 조금씩 기록이 다르나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역사 2020.12.05

진나라의 멸망과 초한 전쟁

진이 정치를 못하자 진섭이 먼저 봉기했고, 이어 호걸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서로 다투었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나 항우에게는 아무 것도 없이 그 세를 틈타 민간에서 일어나 3년 만에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진을 멸망시킨 다음 천하를 나누어 왕과 제후를 봉하니, 정치가 항우에게서 나왔고 이름하여 ‘패왕’이라 했다. -사마천, 사기 항우 본기 춘추전국시대를 종결하고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혹독한 법가에 기반한 정치체제를 운영하였고 멸망한 나라들의 민심을 통합하지 못했다. 백성들은 법이 두려워 진나라를 따랐지만 몹시 피곤한 상황이었다. 북방의 유목 민족인 흉노를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짓는 등 대규모 노역이 실시되고 진시황이 죽자 민심은 폭발하여 농민 봉기가 시작된다.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나라..

역사 2020.12.05

로마의 전성기 5현제

‘Optimus Princeps(지고의 황제)’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내진 찬사 로마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5명의 현명한 황제. 네르바(재위 96~98)-트라야누스(재위 98~117)-하드리아누스(재위 117~138)-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161)-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180)의 5명의 황제를 가리킨다. 대부분의 고대 국가가 세습을 통해서 황제 자리를 유지했지만 5현제의 시기는 예외였다. 이들 5명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아니었으나 황제자리를 세습했고, 능력과 군사력을 입증받고 황제가 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전성기가 열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로마는 현재의 루마니아 지역인 다키아 지역을 정복하고 다키아인들을 노예로 잡았고, 브리타니아 섬에서 스코틀랜드 지역을 제외한 다른 ..

역사/로마사 2020.12.05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