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비동맹 회의와 양자 대립의 완화

삼긱감밥 2020. 12. 6. 01:19
반응형

비동맹 회의와 양자 대립의 완화

 

‘위기의 시기에는 가장 위험한 길이 가장 안전할 때도 있다.‘

 

-전 미국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

 

1955년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표들이 인도네시아 반둥에 모여서 식민주의의 배격을 논의한다. 반둥 회의는 인도네시아와 인도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후 1961년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비동맹 회의가 개최된다. 이 비동맹 회의에는 미국과 소련의 양대 진영에 가입하지 않고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하는 국가들이 모였다. 공산 게릴라 출신이었지만 소련과 냉랭한 관계를 유지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이집트의 반식민주의자 나세르, 인도의 수상 네루 등이 주요 인사였으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대표들이 많은 편이었다.

 

이들은 식민주의를 배격하고 약소국이 냉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을 반대했다. 이 비동맹 회의 국가들을 자본주의 진영이던 미국과 서유럽의 제1 세계, 공산주의 진영이던 소련과 동유럽의 제2 세계와 구분하여 ‘제 3세계’라고 통칭하기도 한다. 비동맹 회의 국가들은 국제 사회에서의 발언력을 높이려 했다.

 

한편, 1960년대 말, 우수리 강 상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인근에서 중국과 소련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한다. 중국과 소련은 이전부터 대 서방 외교 전략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은 서방과의 직접적 대립을 회피하려고 노력한 반면, 중국은 이를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노동자 중심의 혁명을 일으킨 소련과 농민 중심의 혁명을 시도한 중국이 공산주의에 대해 갖는 관점이 다르기도 했다. 안 그래도 사이가 삐걱거리던 양국은 국경 분쟁을 계기로 크게 갈등을 겪게 된다. 양국은 국경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고 갈등이 위험 수위에 이르렀으나 다행히 전쟁 전에 간신히 외교를 통해 봉합되었다. 그러나 초강대국 소련에게 위협을 받은 중국 측에 큰 앙금이 남게 되었다.

 

이 틈을 파고들어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한다. 탁구 통해 중국과 교류하면서(일명 핑퐁 외교)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이후 유엔에서 대만을 밀어내고 중국을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만드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1972년 2월에는 아예 닉슨 대통령이 직접 중국에 방문하여 공동 성명을 발표한다. 1979년에는 자본주의인 미국과 공산주의인 중국이 수교하기까지 한다. 이를 기획한 사람은 닉슨 행정부의 국무부 장관 헨리 키신저(1923~)였다.

 

비동맹 회의의 부상과 미-중 수교로 인하여 미국과 소련의 초강대국 두 나라를 중점으로 하는 양극 체제가 초강대국은 존재하되 그 외의 국가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다극 체제로 나아가게 되었다.

 

반응형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문화대혁명  (0) 2020.12.06
산업혁명  (0) 2020.12.06
소련의 붕괴  (0) 2020.12.06
냉전  (0) 2020.12.06
남북전쟁  (0) 2020.12.06
폴란드와 헝가리의 초기 역사  (0) 2020.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