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마사

아우구스투스

삼긱감밥 2021. 3. 1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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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공화정 수호자들에 의해 암살당하자, 몇몇 사람들은 그의 부하 장군이었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유산을 상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언장을 공개하자 후계자로 지명된 것은 카이사르의 후손인 옥타비아누스라는 젊은이였다. 후순위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이들 중 하나인 브루투스(이후 카시우스와 동방을 다스려 아우구스투스와 대항한 브루투스가 아님)였다. 

 

이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는 당시 젊은 나이의 사람이었는데, 놀랍게도 무서운 정치적 능력과 쇼맨십을 보여주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몫을 차지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옥타비아누스는 매우 특이한 캐릭터였는데, 그의 특징은 바로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들 중 하나이면서도 몸이 매우 약하고 전투에 약했다는 것이다. 로마는 전쟁을 통해 다른 민족을 부수고 영토를 확장한 제국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인재들은 군사 계통에서 나왔고 정치인들도 군 경험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는 모두 전쟁을 통해서 로마에게 승리를 가져다준 이들이었다. 공화정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도 대부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등 장군으로 전투에 유능했던 이들이 칭송을 받았다. 

 

그런데 이 옥타비아누스는 독특하게도 몸이 매우 약했다. 로마의 위대한 황금기를 연 위인인데도 불구하고 약했다는 묘사가 끊임없이 나온다. 왠만하면 위인에 대해 좋게 써주고 패자에 대해 안좋게 쓰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몸이 너무 안좋았나 보다. 그냥 약한 것도 아니고 나중에 권력을 한 손에 틀어쥐고 절대자로 군림할 때도 약했던 것으로 봐서 그냥 정말 몸이 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늘 몸이 약하다 보니까 정치인인데도 사람들 앞에서 직접 나서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서 전쟁도 잘 못했다. 물론 개인의 무술과 군사적 재능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몸은 튼튼하지만 군사적 전략을 잘못 짜는 이도 있다. 

 

말도 못타고 엉성한데도 불구하고 전투에 뛰어난 사람이 있긴 하다. 바로 진나라의 장군으로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에 기여한 두예다. 따라서 반드시 몸이 무예에 뛰어나지 않다고 해서 전투를 못하리란 법은 없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딱히 군공을 보인 적도 없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힘을 합쳐 카시우스와 브루투스가 이끄는 공화정 지지파 군대와 싸울 때 안토니우스는 카시우스에 승리했으나 옥타비아누스는 브루투스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후 카시우스가 섣불리 공화정의 멸망을 예견하고 자살하고, 브루투스가 장기전으로 가지 않고 바로 전투에 임해 패하지 않았다면 로마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안토니우스와의 마지막 일전인 악티움 해전에서 그를 크게 격파하고 로마를 통일하긴 하지만, 그전까지 전혀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이들을 제압하고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리고 로마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는 매우 독특한 그의 능력 때문이다. 그가 보여준 능력은 신중함, 정치력, 책략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젊은 나이에 리더가 된 사람으로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신중함을 보였다. 그는 결단력이 있으면서도 중요 지점에서는 신중함을 보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로마의 일인자가 되고서도 긴장을 놓지 않은 것이다. 그의 선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이 가장 위대한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고, 부하들도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지원하는 행동을 했다. 때문에 공화정 수호파들이 카이사르에 극단적으로 반발해 그를 암살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런 행동을 하는 대신 조용히 일인자가 되자 자신의 권한을 원로원에 돌려 주었다. 자기가 가진 권한 중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집트를 비롯한 속주의 통치권, 군사 지휘권 등은 가지고 실권을 행사하면서, 몇몇 권한을 원로원에게 돌려 주어 그들을 존중하는 척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공화정과 아우구스투스, 민회가 조화롭게 이루어진 정치체제라고는 전혀 말할 수 없다. 이것은 그냥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는 군주정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치적 기교를 부려서 원로원과 기존 공화정에 있던 정치 집단들을 존중하는 척 했다. 때문에 그는 극렬한 반발이나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로마는 다른 내전의 가능성 없이 제국으로 나아갔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아우구스투스와 원수정이라는 책을 보면 잘 나와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또다른 능력은 바로 정치력이다. 그는 엄청나게 노회한 모습을 정치를 통해서 보여준다. 자신이 별다른 군사 경험도 업적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카이사르의 후광에 철저하게 의존했다. 자신이 카이사르의 후손임을 널리 아릴기 위해 그의 이름을 쓰고, 카이사르와 그를 따랐던 마리우스파, 민중 들의 지지자를 규합하여 세력을 불렸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돈이 나오는 동방에 집중할 때 그는 이탈리아를 택함으로써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을 선점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바로 책략이다. 그는 마키아벨리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다른 이들을 이용하고 버리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적이나 중립적인 이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부하나 가족까지 이용할 수 있으면 철저하게 이용하고 누가 강자인지 철저하게 알렸다. 또한 자신의 가족들을 정략 결혼의 도구로 쓰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책략의 가장 큰 희생자가 바로 공화정 수호자중 하나였던 키케로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와 손을 잡고 그의 지지에 나섰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신 3두정치 세력들과의 협약에 따라 그가 죽도록 내버려 두어 키케로는 암살당하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안토니우스와의 협약을 통해 믿을 수 없는 세력이었던 레피두스를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로 기반을 옮기게 해 내다 버렸다. 이후엔 안토니우스에게 뒷통수를 쳐서 그에게 빌린 해군을 다 돌려주지 않았고  그의 유언장을 공개해-이것은 사실인지 위작인지 논란이 있지만- 정치적 영향력을 실추시켰다. 그의 유언장에는 이집트와 클레오파트라가 존중된다고 쓰여 있어 로마 시민들을 분노케 했던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능력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통찰력과 센스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이 불리하여 남과 손을 잡을 땐 절대 이를 드러내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 손을 잡은 후에 다른 이를 배신했다. 이런 순서를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별다른 군사적 재능 없이도 세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세력을 바탕으로 일인자가 된 그는 로마 군인을 직업 군인으로 만드는 새로운 군사체계를 창설하고 그들에게 농지를 주어서 과중한 군비 부담을 줄였다. 이후 공화정과 삼두정치의 시기는 끝나고 제정의 시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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