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대공황과 파시즘

삼긱감밥 2020. 12. 7.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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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과 파시즘

 

‘저는 3개 국어를 합니다. 아이가 셋 있구요. 3달 동안 일을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직 하나의 일자리를 원합니다.’

 

-대공황 당시 실업자의 글

 

1929년 10월, 미국 뉴욕 월가의 주식거래소 주가가 끝도 없이 폭락했다. 거래와 생산이 위축되었고 물건은 팔리지 않았으며 거리마다 실업자들이 속출했다. 실업자들이 물건을 살 돈이 없으니 물건이 또 팔리지 않아 공장이 문을 닫아 실업자들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미국에서 시작댄 이 경제 공황은 곧 유럽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이는 역대 최악의 공황이었기 때문에 대공황(大恐慌, Great depression)이라고 한다.

 

영국과 프랑스같이 식민지가 있는 국가들은 보호 무역을 강화하고, 자국과 식민지 국가들에게 관세에 특혜를 주어서 결집시킴으로써 대공황을 타개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블록 경제라고 한다. 미국은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집권하여 테네시 댐 개발사업과 같은 국가주도의 대규모 경제 개입을 실시했는데, 뉴딜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되자, 각 나라에 불안과 소요가 잇따랐다. 특히 독일에서는 공산당원들이 증가했으며 주류 정당인 사회민주당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때 공산당을 진압하면서 보수 세력의 지지를 업은 정당이 등장했으나, 바로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 나치당이었다.

 

이 당은 국가를 우선시하는 전체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했으며, 개인의 인권은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유대인을 비롯한 소수민족 공격에 적극적이었으며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띠었다. 이 당의 지도자였던 아돌프 히틀러(1889~1945)가 1933년 정권을 얻어내었고,

 

곧 입법부의 기능을 행정부에 위임하는 수권법이 제정되었다. 히틀러는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을 손에 쥐었고 독일은 내각제가 붕괴하여 독재 국가가 되었다. 나치당과 히틀러는 독일 민족주의를 제창하고 유대인이 독일인의 적이라며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였다. 독일인이 다수이던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합병되었다.

 

앞서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임에도 얻은 보상이 변변치 않다고 여겨 연합국에 대한 불만이 고조된 상황이었다. 정치적으로는 파시스트 무솔리니가 정권을 탈취하여 독재 국가를 이끌고 있었다. 일본은 191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하는 민주주의 정치가 이루어졌으나 이누카이 츠요시 총리가 암살당한 후 1936년 2월 26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완전한 군국주의 국가가 된다. 이 세 나라는 서로간의 긴밀한 공조를 꾀했고, 새롭게 전쟁의 싹이 트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영국과 프랑스는 외교로 해결하려 하였으니, 그 결과가 뮌헨 회담(1938)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시 중부 유럽 유일의 민주국가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된 민족은 슬라브족이었지만, 독일인들도 수데텐란트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인 거주 지역을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 수상 체임벌린이 외교적 방법으로 충돌을 막고 독일과의 전쟁을 피해보고자 뮌헨 회담에서 수데텐란트 할양을 지지하면서 결국 수데텐란트는 독일령이 된다. 그러나 히틀러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고 폴란드, 헝가리와 합세하여 아예 나머지 체코슬로바키아 영토도 분할 점령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더 이상 외교로 독일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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