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나라를 세우고 천하를 통일한 무왕은 자신의 아버지인 희창을 주나라 문왕으로 모셨다.그리고 은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참여한 이들에게 땅을 분봉했다.이리하여 재상이었던 강상(태공망이라고도 한다.)은 바다를 접한 동쪽 제나라땅에 봉해졌다.이때,은나라 주왕의 포악한 정치를 보다 못해 사라졌었던 미자계가 무왕에게 간했다.“제발 은나라의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이 말은 은나라는 멸망했지만 대라도 이어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당시 많은 은나라 유민들이 전쟁으로 인해 농사를 짓지 못하고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며,이들을 뜻하는 상商나라의 商상 자가 교역을 뜻하는 한자가 되기에 이르렀던 상황이었다.무왕은 이 말을 듣고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옛 은나라땅의 제후로 임명했다.그리고 자신의 형제인 관숙선管叔鮮,채숙도蔡叔度,곽숙처霍叔處를 무경의 감시자로 임명했다.그리고 감옥에 들어가 있었던 기자를 풀어주었다.기자는 은나라의 땅을 거닐면서,“보리만 무성하구나.어린 녀석(주왕)이 내 말만 들었어도!”라며 한탄하였다.이때부터 나라를 잃은 슬픔을 맥수지탄麥秀之嘆이라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무왕의 정치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형제가 있었으니,백이伯夷와 숙제叔齊였다.고죽국의 왕자 출신이었던 그들은 은나라를 모시던 신하의 국가였던 주나라가 어찌 은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킬 수 있냐며 희발을 따르지 않았다.그들은 주나라의 관직을 맡지 않고 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이들은 훗날 유교의 충의지사로 여겨지게 된다.
어쨌든 이리하여 천하는 희씨의 손에 들어가고 주나라의 질서가 자리잡게 되었다.새로운 천하는 희씨성의 국가들과 강씨의 제나라와 무경의 은나라 유민 국가로 나뉘게 되었다.그런데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히기도 전에 무왕이 죽고 말았다.당장 왕위에 오른 주성왕成王은 어린 아이에 불과하여,정치를 할 능력이 없었다.따라서 주나라 무왕의 동생 주공단周公旦이 나라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앞서 봉해졌던 제후들인 주왕의 아들 무경,관숙선,채숙도가 배신하고야 말았다.이들은 안으로는 주공단이 조카에게서 나라를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렸고,바깥으로는 이민족의 지원을 요청하고 군대를 이끌어 천하를 뒤엎고자 했다.그리고 군대를 이끌고 반란일 일으키니,이를 삼감의난三監-亂이라고 한다.주나라의 정치를 맡고있던 주나라 일족인 섭정 주공단과 태보 소공석召公奭은 침착하게 대처했다.주공단은 제나라의 땅 일부를 떼어내어 노나라를 만들고,자신의 아들 백금을 보내 희씨의 세력 범위를 넓혔다.그리고 자신은 주나라의 수도 호경에 남아 소공석과 함께 제후들을 관리했다.이후 희씨성의 제후국가는 물론이고,무경의 삼촌 미자계와 다른 제후국가들도 이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결국 무경과 이민족의 군대는 주나라 군에 의해 패하게 된다.무경과 관숙선은 처형되고,채숙도는 유배당하고 말았다.주공단은 무경이 다스리던 옛 은나라 유민들을 동생 위강숙과 무경의 삼촌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하니,이것이 위나라와 송나라의 기원이다.
나라를 조카에게서 빼앗으려 했다는 무경의 모함과 달리,주공단은 정말로 조카를 위해서 성실하게 나라를 다스리고 물려줄 생각이었다.그는 어린 주성왕이 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자,자신이 대신 아프기를 하늘에 빌 정도로 충성스럽게 왕을 모셨다.그리고 성왕이 다 자라자 그에게 정치의 실권을 맡겼다.성왕은 한때 주공단의 충정을 의심하기도 했지만,자신이 아프던 때에 주공단이 하늘을 향해 빌었던 것을 알고 그의 충정을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주공단의 노력을 통해 잠시나마 흔들렸던 주나라의 질서가 정립되었다.주공단은 이후에 왕좌를 빼앗을 자리에 있었음에도 그러지 아니하고 성실하게 주군을 모시는 충신이자 성인의 대명사로 여겨지게 된다.공자는 “꿈속에서라도 주공을 보고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한편 주나라와 중화 문명권이 성장하면서 주변의 이민족들과 분쟁이 잦아지게 되어, 강왕의 아들 소왕이 초나라의 원정에서 사망하는등 불운이 따르기도 했으나,이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큰 패배나 위기는 찾아오지 않았다.이리하여 주나라는 제9대 왕인 이왕의 치세때까지 안정된 국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이 수백년동안 주나라의 봉건제는 확고한 전통으로 남게 되었다.
*5등작
제후의 일종인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지위는 중세 유럽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이것은 사실과 차이가 있다.실제 5등작의 지위는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럽의 duke,count,viscount등의 지위는 5등작에 엄밀하게 대응하지 않으며,유럽 각국마다 지위의 고하에 차이가 있어서 통일된 개념도 아니었다.
5등작중 으뜸인 공작은 주나라 천자를 제외한 이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지위였다.처음부터 공작의 지위를 부여받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그러나 춘추시대 중반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나라가 공작으로 자칭하거나 승격되었고 이에 따라 유명무실해졌다.처음부터 공작의 지위였던 나라로는 미자계의 송나라가 있다.
대부분의 제후들은 후작이었다.위나라,진나라등의 춘추시대 대부분의 국가들이 후작의 지위를 계승했다.역시 주나라 왕실의 힘이 약해진 이후로는 대부분의 후작들이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기위해 공작을 칭하게 되었다.
백작은 공작과 후작보다 작은 규모의 땅에 해당하는 지위로,정나라와 조나라 등이 있었다.자작과 남작은 이보다도 못한 허나라와 같은 약소국들의 지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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