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주나라가 천도하고 춘추시대가 개막하다

삼긱감밥 2020. 12. 16.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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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가 안정된 국가로 자리잡던 즈음,제 10대 왕으로 여왕厲王이 즉위했다.그는 성품이 몹시 포악하고 잔인한 편이었다.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싫어하고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을 좋아했다.따라서 간신을 등용하고 주정공과 소목공의 충언은 무시했다.그리고 토지와 산림의 관리권을 회수하려고 했다.이에 백성들이 여왕을 비판하자,여왕은 잔인한 형벌을 내려서 이에 보복했다.백성들은 서로 모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눈빛만으로 의도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었다.공안정국이 되어 백성들은 피곤해져만 가는데 여왕은 간신들의 말만 들을 뿐이었다.제후들은 더 이상 조정에 와서 왕을 조회하지 않았고,조정의 부패는 끝을 몰랐다.마침내 기원전 841년에 주나라 사람들이 모여 난을 일으키고 여왕을 죽이기 위해 들고 일어서니 이를 국인폭동이라고 한다.

 

여왕은 간신히 죽기전에 탈출하여 체 땅으로 도망갔다.군주가 사라진 주나라의 정치를 돌보기 위해,신하였던 주정공과 소목공이 서로 협의하여 나라를 다스리니 이것이 바로 공화共和제도의 기원이다.여왕의 무능과 폭정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었지만 이것은 주나라를 대하는 제후국들의 태도를 바꾸었다.이는 더이상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가 안정된 나라가 아님을 암시했기 때문이다.제후들은 아직 대놓고 침략에 나서진 못했지만 힘에 의한 정치를 꾀하게 되었다.

 

주정공과 소목공이 14년동안 공화제도를 실시한 이후 여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선왕을 데려와 다시 모셨다.이를 통해 주나라는 짧았던 공화제도가 끝나고 군주제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전에 여왕이 쫓겨나는 일이 발생했지만 다행히 선왕의 통치기간 주나라는 제후국에 대한 권위를 잃지 않았다. 선왕은 자신의 동생인 우를 정나라 땅에 봉하였는데,그가 바로 정환공으로 이것이 정나라의 기원이다. 그러나 주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머지 않아 주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을 역사적인 사건이 생기게 된다.

 

선왕이 자그마치 46년동안 나라를 다스리다 죽은 이후,선왕의 아들 유왕이 즉위했다.그는 신후와 결혼하여 신후와의 사이에 태자 의구를 두었다.그러나,정실부인인 신후가 아닌 첩 포사를 더 총애했고 이것이 주나라의 운명을 쇠락시키고 만다.이전에 은의 주왕이 달기를 총애하여 은나라를 망쳤듯이,유왕은 포사를 몹시 아꼈고 포사가 좋아하는 일은 뭐든지 하려고 노력했다.어느 날,주나라의 위기상황을 알리는 봉화가 실수로 피워올려져서 제후들이 깜짝 놀라 주나라로 군대를 이끌고 달려왔다.봉화가 잘못 올려진 것이었고 제후들은 허탕친 것에 황당해했지만 포사는 이것을 보고 웃었다.그러자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사랑스레 여겨 계속해서 가짜 봉화를 올리고 제후를 불러들이는 일을 반복했다.제후들은 유왕의 행동에 신물이 났고,유왕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게 되었다.앞서 정환공으로 봉해졌던 유왕의 삼촌 우는 당시 사도의 지위에 있었는데, 주나라에 재앙이 닥칠 것을 알고 정나라의 영지를 옮겼다.

 

포사를 총애하던 유왕은 마침내 포사의 달콤한 꼬임에 넘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니, 가만히 있는 태자 의구를 폐하고 아내 신후를 쫓아내기로 한 것이다.말 그대로 포사를 위해서 한 행동이었다.그는 포사를 왕후로 삼고 그의 아들 백복을 태자로 삼아 새로운 가족을 꾸리려 한 것이다.당연히 태자 의구 입장에서는 날벼락같은 일이었다.뿐만아니라 신후의 친정 식구들도 분노하여 유왕을 죽일 기세였다.신후申后의 친정 아버지 신후申侯는 반란을 일으켜 유왕을 죽이기 위해 이민족인 견융과 손잡고 군을 모아 유왕에게 쳐들어갔다.유왕은 다급히 봉화를 올려서 제후들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제후들은 또 포사를 위한 장난질이라고 여겨 도와주러 오지 않았다.유왕과 백복은 살해당했고,포사는 견융에게 끌려갔다.충성스러웠던 유왕의 삼촌 정환공 우 역시 전쟁통에 유왕을 따르다가 죽고 말았다.제후들은 죽은 유왕을 대신해 태자 의구를 옹립하니 그가 주평왕이다.

 

어떻게든 폐태자되는 것을 피하고 왕위에 즉위하는데 성공한 평왕이었으나,전쟁으로 주나라의 수도 호경은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주나라의 권위를 생각해서 엄숙한 통치를 하려고 해도 뭔가 할 수 있는 여건이 도저히 아니었다.진나라와 정나라는 수도를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괵나라와 위나라는 그랬다가는 왕실이 약해진 것이 드러나 권위가 쇠락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고심 끝에 평왕은 진나라와 정나라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을 호경에서 낙읍으로 옮기니,이 천도 이후의 주나라를 동주라고 한다.위나라는 마지못해 이를 따랐고 괵나라는 이에 저항하다가 진나라에 의해 토벌되어 천도는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주나라가 더 이상 예전의 천자 나라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현실을 목도한 제후들은 약해진 주나라 왕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다.이리하여 안정되었던 봉건제 질서가 흔들리고 제후국간의 각축이 시작되니,이것을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의 이름을 따 춘추春秋시대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어원

주나라가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한 기원전 770년부터 진나라가 위,조,한나라로 쪼개진 403년까지의 시기를 춘추春秋시대라고 한다.이는 공자가 쓴 역사서이자 5경의 하나인 춘추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기원전 403년부터 진시황에 의해 중국 전토가 통일된 기원전 221년까지의 시기를 전국戰國시대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의 권위가 쇠락해지고 제후들이 서로 경쟁하며 반목하던 시기이다.이는 부국강병을 위한 각 나라의 노력으로 이어졌기에다양한 사상이 꽃피우는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흔들렸던 천하는 전국시대 중기에 접어들어 진,위,조,한,초,조,연의 전국7웅으로 재편되었고, 이들 국가중에서 법가 사상을 채택한 진나라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면서 천하는 다시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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