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국가는 보통 은殷나라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중국의 역사는 하나라로부터 시작된다고 주장한다는 설도 있지만,일각에서는 이런 의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하나라가 국가체제를 갖추고 원시적이나마 고대 국가로서 기능했음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주나라와 은나라는 문명 유적지에서 확실히 국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은나라의 경우,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존재를 의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중국인들중에서도 사마천이 은나라와 그 왕조를 기록한 것이 신빙성이 없다고 본 사람도 있었다.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은허에서 유적지가 발굴되고 그 유적에 적힌 왕조의 내용이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내용과 매우 흡사함이 확인됨에 이르렀다. 그래서 현재는 은나라를 보통 고대 중국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
은나라는 사실 중국 고대 국가의 원래 이름이 아니다.그들의 원래 이름은 상商나라였고,스스로도 상나라로 불렀지만 주변 국가들이 은나라라고 부른 것에 유래하여 은나라라는 이름이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이 은나라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문명이었다.아직 체계적인 국가정비가 이루어지기 전이었기에,제물을 바치고 신에 의존하는 종교적인 색채가 매우 강한 문명이었다.그들은 거북이 등딱지로 점을 쳐서 운명을 예견하곤 했다.가장 흔한 방법은 불에 지진 인두를 거북이 등딱지에 놓는 것이었다.그러면 열이 전도되어 딱지가 온도차를 견디지 못하고 갈라지게 된다.그러면 그 갈라진 틈새와 구멍을 보고 앞으로의 미래를 판단하는 것이다.이것을 갑골문甲骨文이라고 한다.이러한 점은 중국에 널리 퍼졌으며,춘추시대 이후까지도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은나라는 30대를 이어내려왔다.그러나 기원전 11세기경에 30번째 왕인 주왕 제신帝辛에 의하여 위기를 맞게 되었다.주왕은 잔인한 행동을 펼치며 포악한 정치를 펼쳤다.그는 애첩인 달기를 애지중지하고 환락에 빠져 인심을 잃었다.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일화로는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일화로는 주지육림酒池肉林과 포락지형炮烙之刑이 있다.주지육림은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었다는 뜻이다.주왕은 궁과 놀이터를 마구 짓고 짐승과 새를 키웠다.그리고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처럼 만든뒤 남녀가 서로 벗고 즐겼는데,여기서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매달아 숲처럼 만든’것이 주지육림의 유래가 되었다.포락지형은 매우 끔찍하고 잔인한 형벌로,죄인으로 하여금 기름칠을 한 구리기둥을 건너가게 하는 형벌이었다.구리기둥 아래에는 불을 태워서 구리기둥을 건너다 넘어지면 바로 불에 타죽는 것이었다.
주왕의 잔인한 정치에 사람들은 공포에 빠졌다. 이를 보다 못한 은나라의 일족 비간比干이 주왕에게 덕을 쌓으라고 간하였다.그러나 주왕은 이를 들은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비간에게,“내가 알기로 현명한 사람에게는 심장에 구멍이 7개 있다고 하던데,궁금하오.”라고 말하고 비간을 죽여버리고 말았다.또다른 일족 기자箕子는 주왕에게 간언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기자는 계속 바른 소리를 하다 살해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미친 사람 시늉을 했고, 주왕은 그를 노비로 삼았다.주왕의 이복형 미자계微子啟는 주왕은 가망이 없다고 보고 아예 사라져 버렸다.
주왕이 은나라 사람들,그중에서도 자신에게 가까운 황족들에게 하는 행동이 이정도였으니 다른 나라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은나라의 포악한 통치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이들은 희창姬昌에게 모여들었다.희창은 제후의 한 사람으로,주왕의 잔인한 정치를 안타깝게 여기고 탄식하던 사람이었다.그러나 탄식한 것을 밀고당해 감옥에 갇혀 죽을 뻔하였고, 간신히 그의 신하가 보물과 준마를 뇌물로 바쳐서 살아남았었다.사람들은 희창에게 은나라에 대항할 것을 권했으나,희창은 아직 때가 되었다고 보지 않았다.희창은 서부 지역 제후들의 맹주가 되어 때를 기다리다가 죽고 말았다.희창의 첫째 아들 백읍고는 이미 희창보다 먼저 죽은 상황이었기에 둘째 아들 희발姬發이 그의 지위를 계승하니,이 사람이 바로 주나라 무왕이다.
무왕 역시 경거망동을 삼가고 때를 기다렸다.그는 많은 제후와 사람들이 군을 이끌고 자신을 위해 모인 것을 확인하였으나,바로 공격하지 않고 인내하였다.그리고 마침내 대대적으로 군을 모아 은나라에 쳐들어갔다.주왕은 군대를 이끌고 목야에서 마주쳐 전투가 벌어졌다. 은나라는 패권국이었고 오랫동안 권세를 유지했지만,폭압적인 정치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모두 등을 돌린 상황이었다.이런 상황에서 은나라의 주왕마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으니 지휘관도 군사들도 무왕을 당해낼 수 없었다.목야에서 대패한 주왕은 보물을 쌓아놓은 자신의 누대에서 자살하였고,이리하여 은나라는 30대를 마지막으로 멸망하고 말았고,무왕에 의해 주周나라가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대한 이야기
역성혁명은 말 그대로 성을 바꾸는 혁명이다.중국의 정치체제는 근대이전까지 계속해서 군주제였고,국가가 바뀌었다고 해서 국가체제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따라서 군주제의 형태를 유지하되 왕조의 성씨가 바뀌는 역성혁명이 일어났다.그 역성혁명중에서 가장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세워진 희씨의 역성혁명이다.
훗날 전국시대의 사상가인 맹자는,포악한 왕이 백성들을 중시하는 민본사상에 의지하지 않고 혹정을 행하면 응당 죽여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그에 따르면,무왕이 주왕을 죽인 행위는 ‘왕’을 죽인 패역이 아니라,폭압을 일삼는 ‘일개 사람’을 죽인 정당한 행위가 된다.이는 이후에 혼란한 천하에서 억압된 정치가 일어나는 시기에 일어나는 저항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명분이 되었다.
그러나 무왕이 주왕을 죽인 것이 폭군을 몰아낸 역성혁명인지에 대해서는 이론도 있다.춘추시대에도 이미 주왕이 지나치게 나쁜 사람으로 조작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주나라 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폭군으로 묘사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춘추전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진영공晉 靈公과 동호직필董狐直筆 (0) | 2020.12.16 |
|---|---|
| 삼환 三桓 (0) | 2020.12.15 |
| 기자箕子 (0) | 2020.12.15 |
| 상앙과 자산 (0) | 2020.12.15 |
| 상앙과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0) | 2020.12.15 |
| 맥수지탄(麥秀之嘆) (0) | 2020.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