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공자와 도가의 도피

삼긱감밥 2020. 12. 16.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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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보면 공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들이 공자를 비판하는 이유는 매우 다양하다. 제나라의 대부 안영은 유가에서 말하는 예법이 잡다하기 짝이없어 배우다가 사람이 먼저 죽을 것이라고 비판하여 공자가 제나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도 했다. 초나라 소왕의 신하 영윤 자서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재주가 뛰어난데 초나라에 들어오면 초나라엔 그만한 인재가 없으니 좋은 일이 아니라며 그의 입국을 막기도 했다. 양호처럼 공자가 정치와 현실참여를 강조하면서도 때만 기다리는 것을 은근히 돌려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외에도 논어에는 유교의 번잡한 예법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이 등장한다.

 

 비판자들중에서 가장 공자와 갈등했던 이들은 바로 도가계열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을 대하는 공자의 태도는 크게 강한 혐오와 동정적 비판으로 나타난다. 강한 혐오를 나타내는 대상으로 대표적인 이가 원양이 있겠다. 원양은 노나라 사람으로 가족이 죽어도 노래를 불렀다는 장자의 이야기와 흡사한 일화가 전하는데, 공자는 늙어서 죽지도 않는 도적이라고 원양의 정강이를 막대기로 때린 바 있다. 공자는 예법을 매우 중요시했기에, 제자인 재여가 유교의 장례문화에 대해 비판하자 격분하여 토론한 적도 있다. 공자가 도가 계열의 인물들과 예법에 대해 갈등한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한편, 공자를 비판하는 사람들중에서 공자가 동정을 드러낸 사람들도 있다. 바로 은일거사들이다. 이들은 특별한 본명이 없이 등장하는 지역이나 근처의 모습등을 취해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공자는 이들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동정했다. 공자가 보기에 그들이 사회에 있지 않고 초야에 파묻혀 사는 것은 사회가 그만큼 혼란스럽고 파괴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공자는 그들을 동정할지언정 그들과 같이 살지 않았다. 공자가 바라보는 인간은 사회적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문명 세계로 돌입했고,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번 사회화된 인간에게 적합한 장소는 사회에서 도태된 은둔처가 아닌 예와 의가 살아있는 사회였다. 공자는 사회의 문제점을 알면서도 사회 개혁을 통해 이를 타개해야한다는 사상가였기에 은둔을 긍정적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이와 별도로,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들 은일거사들의 삶은 진정한 의미로의 은둔으로 남을 수 없다고 본다. 이들은 사회적 삶을 포기하고 자연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예절과 생활방식은 사회의 것을 버리지 못했다. 따라서 정말로 완벽한 은둔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움을 반증한 셈이다.

 

또한 이들의 은둔은 조만간 파괴될 운명이었다. 춘추시대 중,후기에 이르자 각 국가들은 성읍과 그를 중심으로한 지역 뿐만 아니라 외곽 지역이나 한적한 농촌까지 조세 지역을 확대했다. 또한 전국시대에 이르자 징병을 통한 국가적 동원체제가 확장되었다. 부국강병을 위한 법과 조세는 결국 은일거사들의 도피처까지 닿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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