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공자를 받아들이길 거부한 이들

삼긱감밥 2020. 12. 16.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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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 제나라 사람. 키가 매우 작고 볼품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나라의 대부를 지내며 제나라 경공을 보필했다. 제장공이 시해되고 제나라 정치 지형이 요동치는 상황에서 중립을 지켰으며(제장공의 시신에 예를 갖추긴 함), 이후에도 그는 계찰의 조언을 받아 자신의 봉읍을 반환했기 때문에 내란에도 휘말리지 않았다.

 

그는 제나라의 현자로 여겨져 안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시장 옆에 살고 군주가 내려주는 좋은 집도 마다하고 청렴결백하게 살았다. 말을 요긴하게 잘 하여 제경공의 정책을 은근히 비판하기도 하고, 바른 정치를 위해서 힘을 쏟았다. 점점 전씨들의 힘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공자가 말하는 사상인 유가를 따르자면 하루종일 예법을 배워도 오래 걸린다며 백성들을 피곤하게 할 뿐이니 들어오지 못하도록 간하여 공자의 제나라 진출을 막았다. 원래 제나라에서는 공자를 노나라의 집권자인 계씨보다 약간 낮은 대우로 맞이하려 하였으나 이때문에 취소되었다. 

 

자서: 초나라 영윤. 공자가 초나라로 가려고 하자 초소왕에게 간하여 이를 말렸다. 초소왕 밑에서 재상에 해당하는 영윤을 지냈다. 이전 왕인 초평왕이 죽었을때, 초소왕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혼란이 뒤따르게 되었다. 영윤 자상(낭와)은 이를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만 채워 혼란을 부추기기만 했다. 결국 오나라가 쳐들어와 초나라 수도가 함락되고 초평왕의 시신이 오자서에게 걸레조각처럼 찢어지게 된다.

 

초소왕은 이때 오나라 군을 피해서 도망친 상황이었는데, 신포서가 진나라 군을 데려오고 삼촌인 자서가 초소왕을 도우면서 위기 상황에서 간신히 초나라가 추슬러진다. 마침 오나라에서 초나라 평왕의 태자였던 태자 건의 아들 공자 승을 초나라에서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퇴각하겠다고 제의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졌다.

 

자서는 이후 초소왕 밑에서 영윤을 지내며 초나라의 국력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공자가 찾아오려 하자 공자의 제자들은 매우 훌륭한데 공자의 근거지까지 마련해준다면 이는 초나라에 좋지 않을 것이라며 말렸다. 혼란한 초나라 국내정세와 위기상황을 겪어 흔들리는 왕실의 위세를 생각한 판단으로 추측된다.

 

이후 위에서 언급했던 공자 승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여 사람들이 대책을 세우라고 요구했음에도 승을 믿고 있다가 승의 반란에 살해된다.

 

 

안영과 자서 이 둘을 살펴보면 매우 충직한 신하로, 목숨을 거는 위험한 상황(제나라 내란, 초나라 수도 함락)에서도 군주에게 예를 갖추길 주저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또한 질투가 심하다거나 권력욕이 강하다거나 하는 인격적 결함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은 왜 공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전력을 다한 것일까.

 

자서의 경우는 쉽게 설명된다. 당시 초나라는 나라의 명신들이 살해당하거나 외국으로 떠난 상황에서 남은 사람들만으로 어린 왕을 도와서 간신히 재건된 상황이다. 왕실의 위세는 땅에 떨어졌고(초소왕이 너무 어려서 재난을 막지 못했다.), 수도는 쑥대밭이 되어서 정치적 혼란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와 그 제자들이 들어온다면 왕실의 권위가 치명적인 위협을 받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안영은 왜 공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공자와 안영은 모두 대부의 전횡을 싫어한 사람들인데, 공자는 노나라 군주의 권력을 빼앗은 3환(특히 계손씨)을 증오했고 안영은 제나라 전씨일족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둘다 예에 밝았고(안영은 처신이나 예에 있어서 어리석은 면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춘추인물중 하나이다.) 바른 정치를 위해 노력했다. 

 

안영 본인은 공자의 사상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공자가 대부로 들어와서 그 일문에 의해 군주의 권위가 위협받을 것을 걱정한 것인가? 둘 다 가능성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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