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

조무령왕의 허무한 죽음

삼긱감밥 2020. 12. 17.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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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령왕(BC 340?~ BC 295?)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군주이다. 조무령왕趙武靈王이라는 호칭은 약간 독특한데, 보통 이시대 왕들의 호칭이 3글자이기 때문이다. 제민왕, 양혜왕, 연소왕처럼 말이다. 또한, 武靈이라는 시호는 조무령왕만이 가지고 있다. 무는 보통 전쟁이나 군사적 업적을 남긴 군주들에게 남기는 시호이다. 그런데 영이라는 시호는 보통 시법에서 나쁜 시호로 쓰이는 악시이다. (백제의 무령왕은 寧편안할 영자를 써서 의미가 다르다.) 시호로 쓰이는 靈자의 뜻중 하나는 亂而不順(난이불순) : '난이 일어나고 순응하지 않았다' 이니 죽은 사람에게 쓰이는 시호로는 의미가 묘한 것이다. 군사적 업적을 남겼고, 난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시호는 의미가 복잡하지만 사실 조무령왕에겐 딱 어울리는 시호이다.

 

원래 고대 춘추시대, 중원의 강국은 진晋나라였다. 진나라 군주는 패자로 행동했고, 주나라 천자에게 숙부라고 불렸으며, 진나라에 있는 신하 가문이 다른 국가의 군주와 맞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렇게 강한 진나라는 점점 군주의 힘이 약해지더니 마침내 오랫동안 가문의 땅을 넓힌 신하들에 의해 셋으로 쪼개지고 만다. 위, 한, 조나라가 그것이다. 위나라와 한나라는 중원에 위치했고 조는 상대족으로 북쪽에 위치했다. 위나라는 안읍과 대량, 한나라는 신정을 비롯한 정나라의 옛 땅과 주나라 인근, 조나라는 한단과 진양을 거점으로 했다.

 

조나라의 5대 군주 조숙후가 죽자, 그의 아들 조옹이 즉위하니 바로 조무령왕이다. 즉위시에 위나라 양왕과 한나라 선왕이 와서 조회하였던 것으로 보아 위,한나라와의 관계가 양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위당시 나이는 325년경 즉위했으니 기껏해야 15살 정도였던 셈이다. 그래서 조무령왕이 직접 정치를 하지는 않았고 원로 관리들과 조숙후의 대신 비의가 대신 나라를 다스렸다. 원래 조무령왕 즉위 당시에는 왕을 칭하지 않았다. 인근의 국가들은 저마다 왕을 칭했지만, 조무령왕은 왕을 칭하는게 무슨 실질적인 도움이 되냐며 군君으로 불리기를 자청했기 때문이다. 비교적 젊을 때부터 실용적인 정치를 추구한 셈이다.

 

즉위 초 위,한나라와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동맹하여 전쟁에 임하였는데,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8만명의목이 베였다. 이후 제나라가 동쪽에서 쳐들어와 관택에서 조나라를 격파했다. 서의 진, 동의 제에게 양쪽으로 샌드위치 협공을 받은 것이다. 진나라는 이후에도 계속 쳐들어와 중도,서양,인을 함락시키고 장군 조장을 포로로 삼는다. 위,한나라 만큼 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댄 것은 아니지만 줄곧 패배한 것으로 볼 때 진나라를 몹시 위협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즉위한지 어언 17년, 30이 넘자 조무령왕은 목표를 하나 정한다. 대를 쌓아 제나라와 중산의 국경을

살핀 것이다. 이는 조나라의 위협이 되던 중산국과 제나라를 치겠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2년 후에 그 유명한 호복기사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

 

당시 중국 사람들은 북방 유목민들과는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팔이 거추장스럽고 옷이 늘어지니 말을 타기 부적합했는데, 조무령왕은 오랑캐라 멸시당하던 북방 민족의 옷을 입는 기병대를 육성하여 주변국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정세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신하 누완과 선대부터의 총신 비의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숙부 공자 성은 일족의 어른이면서도 이를 입으려 하지 않았다. 조무령왕은 내가 욕심과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일과 공을 세우기 위함이라며 설득하나 공자 성은 인심을 거역하고 중국과 멀어지려 한다며 거절한다. 조무령왕이 직접 찾아가 이전에 중산국이 제나라를 등에 업고 조를 침략한 일을 상기시키자 공자 성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외에 조씨 일족내의 반발이 있었으나 무마되고 결국 호복기사 정책을 채택하여 기병과 사수를 모았다.

 

호복기사가 채택되자 조나라는 중산국에 쳐들어간다. 중산국은 위나라와 조나라, 제나라 사이에 있던 나라로 이전에 위문후와 그의 장군 악양에 의해 멸망되었으나 재건되어 조나라에 쳐들어오곤 했다. 조무령왕은 1차 원정때 중산국의 땅을 공략한 다음 2차 원정때 조소의 우군, 허균의 좌군, 공자 장의 중군, 우전의 전차+기병대와, 조희의 이민족군을 이끌고 중산의 요새를 점령했다. 중산국 왕이 강화를 청하자 받아들였으나 다음 해,그 다다음해에도 계속 쳐들어갔고 몇년후 결국 멸망시켰다.

 

이제 중산국과 호를 점령했으니, 전국시대 최대의 대국 진나라에 쳐들어갈 차례였다. 조무령왕은 아들 하에게 나라를 물려줘 조나라의 왕으로 삼고는(이 하가 조혜문왕이다.) 스스로는 주부가 되어 군사를 이끌었다. 남쪽으로 내려가 한,위나라와 서쪽으로 나아가서 패한 경험이 있으니, 이제 반대로 서북쪽 평원에서 남쪽으로 직진해 진나라 본진을 급습하는 계책을 짠 것이다. 조무령왕은 스스로 사신이라고 하며 진나라에 몰래 들어간 뒤 진왕과 진나라의 지형을 관찰한다. 진나라 사람들은 뒤늦게 쫓았으나 놓치고 말았다. 훈련된 강군이 있었고 동쪽을 제압한 데다 진나라 지형까지 알아냈다.

 

이에 더해 북쪽의 땅을 얻었고, 대나라로 가는 길을 열었다. 누번왕의 군사를 징발하여 이민족 군대도 얻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터진다.

 

앞서 왕위를 물려받은 하는 원래 둘째아들이었다. 첫째아들은 공자 장으로, 둘째아들인 동생 조하가 나라를 물려받은 것에 승복하지 않았다. 주부는 공자 장을 북쪽 대나라의 안양군으로 봉하고, 전불례에게 보좌하게 했다. 신하 이태는 총신 비의에게 공자 장은 교만하고 전불례는 교만하여 둘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니 차라리 공자 성에게 정권을 넘기고 아픈 척 집에서 쉬라고 권했으나 비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태는 이제 비의를 보는 것도 올해뿐일 것이라며 울고 돌아간다. 비의는 왕을 보려고 하는 자는 직접 먼저 보고 몸으로 막은 다음 별 일 없으면 왕에게 들여보내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에게 나라를 물려준 지 4년째에, 주부와 하가 사구에 놀러가서 서로 다른 궁에 묵고 있었다. 공자 장은 전불례와 반란을 일으킨 다음 주부의 명이라고 왕을 소환했다. 앞서 말한 대로 비의가 직접 스스로 먼저 만나자 비의를 살해한다. 공자 성과 이태는 병사를 일으켜서 공자 장과 전불례를 죽이고 잔당을 참살했다. 그리고 공자 성이 정권을 잡아 안평군이 되고, 이태는 대법관격인 사구가 되었다.

 

공자 장은 앞서 죽기 전에 주부의 궁에 도망갔다. 주부는 이를 받아들였는데, 공자 성과 이태의 군사가 궁을 포위했다. 공자 성과 이태는 어린 왕 하 대신 정권을 잡은데다가, 공자 장때문에 주부를 포위했는데 군을 철수했다간 주부를 포위한 죄로 멸족당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그냥 주부까지 죽여버리기로 한다. 궁중 사람들에게 늦게 나오면 멸족시켜버리겠다고 협박하자 궁중 사람들이 모두 나왔고, 주부는 배고픔을 못이겨 참새 새끼라도 잡아먹다가 굶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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