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의 역사는 은나라, 주나라에서 기원한다. 은나라는 갑골문을 쓰고 제사를 중심으로 하는 작은 문명이었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은 매우 포악한 인물로, 사람에게 기둥을 걷게 하여 떨어지면 불에 타 죽도록 하는 포락지형이라는 흉악한 형벌을 만들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후들을 살해하고, 자신의 뜻대로 포악한 통치를 계속했다.
이런 주왕에 맞서서 새로운 나라를 만든 것이 바로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이었다. 아버지 문왕은 주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제후들의 마음을 샀고, 아들인 무왕은 군대를 이끌고 은나라의 주왕을 격파하여 주왕을 죽음으로 몰았다. 무왕의 시대부터 주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화 질서가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지방에 가족들을 왕으로 둔 봉건 국가였다. 주나라는 중앙에 위치한 주나라 천자의 동생들, 친척들을 지방의 왕으로 봉했다. 주나라의 성씨인 희씨가 아닌 아닌 나라 중에서 중요한 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였다. 제나라는 강태공을 시조로 두는 동쪽에 위치한 강씨 성의 나라였고, 초나라는 남쪽에 위치하여 오랑캐 취급을 받았으나 차츰 중원과 동화되었다.
봉건제는 초기에는 인척 관계가 끈끈하여 잘 유지되었지만 친척이란 시간이 지나면 생물학적으로 멀어지기 마련이다. 내 동생은 나와 가깝겠지만, 내 손자는 내 동생의 손자와는 거의 남일 것이다. 결국 주나라의 봉건제는 점차 붕괴하여 혼란 속에서 국가들이 난립하는 춘추시대가 된다. 춘추시대에는 제후들이 난립하긴 했지만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명목상의 천자인 주나라 왕을 모시고, 다른 이민족 국가들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면서 결속을 다졌다.
제후들 중에서 특히 패업을 세운 이들을 춘추 5패라 하여 따로 기념하기도 한다. 주로 관중을 등용하여 제나라를 부국으로 만들고 이민족을 막았던 제나라의 환공, 오랜 유랑세월 끝에 진나라로 돌아와서 나라를 강대하게 만들고 초나라를 격파한 진나라 문공, 초나라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고 중원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던 초나라 장왕, 오나라의 합려와 월나라의 구천을 춘추 5패로 꼽는 편이다.
춘추전국시대 후반이 되자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주나라 천자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예절이나 명분이 아닌 오직 힘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신하들은 하극상을 일으켜서 왕의 나라를 찢어 가졌으며, 주나라 천자의 이름은 별다른 영향력이 없는 시대가 되었다. 이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다.
전국시대 후반이 되자 많은 나라들이 전쟁 속에서 망하고 딱 7나라만 남게 된다. 7나라는 서쪽의 강대한 진나라, 남쪽의 초나라, 동쪽의 제나라, 중원의 위, 조, 한나라, 북쪽의 연나라였다. 이들 중 진나라가 가장 세력이 강했다. 진나라는 위치 자체가 서북쪽에 치우쳐져 있어서 다른 나라를 막기 쉬웠다. 다른 나라들은 한 나라를 상대하면 다른 쪽에서 공격당할 가능성을 조금씩 가지고 있었지만 진나라는 그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진나라는 비교적 일찍이 법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법가 사상을 받아들였다. 다른 나라 출신인 상앙을 등용하여 법가 사상을 채택한 것이다. 그리고 농업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고 농민들을 전쟁에 이끌어 전쟁터에서 세운 공에 따라 상을 주었다. 진나라는 사람에게 20개의 등급을 매기는 시스템이 있어 공을 세우면 등급이 하나씩 올라갔다.
또한 진나라는 원교근공책을 채택했다. 원교근공책은 진나라에 들어온 범수가 제안한 것으로, 가까운 나라와는 전쟁을 하고 먼 나라와는 친교를 맺는 외교 전략이다. 원교근공책을 통해서 진나라는 가까운 나라들을 작게 만들어 병합하고 먼 나라들과 전쟁을 하면서 헛된 힘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전략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진나라가 후발 주자로서 다른 나라보다 발전이 늦었음에도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등용하여 고위 관직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법가 사상을 주장한 상앙과 원교근공을 주장한 범수 모두 진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인이었다. 이런 지리적 이점과 법가 사상, 국가의 포용력을 활용하여 진나라는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결국 다른 나라들은 진나라의 군주 진시황 대에 이르러 대부분 멸망한다. 세력이 약한 한나라는 쉽게 망해버렸고, 비교적 규모가 컸고 강대했던 초나라가 항연 장군을 중심으로 진나라와 싸웠으나 망하고 항연도 죽었다. 위나라는 성이 물에 잠기는 수공을 당하면서 멸망했고, 조나라는 이전에 장평 대전에서 진나라 군대에 의해 수십만의 병사가 학살당한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했다.
제나라는 항복했고, 연나라는 태자가 진시황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 형가를 보냈으나 실패하면서 맥없이 무너졌다. 이렇게 진나라를 제외한 국가들이 차례차례 멸망하여 천하는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이때 진나라의 군주는 진왕 정이었다. 진왕 정은 진시황이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천하를 통일하고 각지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했다.
진시황은 통일 이후 행정제도를 개혁하여 각 지방에 제후들이 다스리는 독립된 왕국이 아닌 중앙에서 통제되는 관리의 통치를 받는 군을 만들었다. 각 군에는 감사 역할을 하는 사람을 두어서 효율적인 감시가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지역에서 다르게 사용되던 도량형을 통일하여 하나의 도량형을 만들었다. 진시황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한 덕분에 효율적인 개혁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진시황은 안정된 위치를 점하고 모든 땅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음에도 망국의 백성을 위로하고 패자를 안심시키는 정치를 펼치기 보다는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와 그를 모시는 승상 이사, 환관 조고는 법을 다뤄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데 능했다. 진시황과 이사는 법가를 제외한 다른 서적은 불에 태우고 유생을 땅에 묻어버리는 분서갱유 사건을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진시황은 자신의 첫째 아들인 부소와 명문가의 장군 몽염을 북방에 파견하여 만리장성을 쌓도록 했다. 흉노와의 전쟁을 위해서 성을 쌓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이를 위해서 많은 백성들이 노역에 동원되었다. 고통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점차 지쳐갔다.
망한 여섯 나라의 백성들은 진나라를 원망했다. 그들의 가족들이 진나라와 싸우면서 무참히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진나라의 법가는 우리가 누리는 현대의 법치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매우 혹독하고 예외를 거의 두지 않았다. 전제군주를 두고 그 밑의 관리들이 법에 따라서 백성들을 부리는 체제였다. 천하를 통일하는 전쟁을 위해서는 법이 큰 도움이 되었지만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는 지나치게 혹독해서 백성들의 원망이 컸다. 북방에 장성을 쌓는 일, 아방궁을 짓는 일에 사람들이 많이 동원되어 백성들이 지치게 되었다.
진시황이 살아있던 시절에는 나라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진시황은 자신의 수명을 무한히 하려는 욕심에 과욕을 부린다. 진시황은 도사를 부려서 죽지 않는 비술을 연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각지에 많은 도사들을 파견하여 불로장생의 명약을 구하고 영원히 살고자 했다. 하지만 도사들은 진시황을 속이고 도망치는 일이 잦았다.
천하를 통일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죽는다. 원칙적으로는 진시황의 아들 부소가 그의 뒤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진시황을 섬긴 진나라의 환관 조고와 2인자인 승상 이사는 말을 맞췄다. 그래서 이들은 진시황의 첫째 아들이 아닌 막내 아들 호해를 2세 황제로 만들고 부소와 몽염을 죽여서 권력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