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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 시대의 지중해 세계 읽고 새롭게 알게 된 것들 3

삼긱감밥 2021. 2. 1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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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5세는 스페인의 주인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특히 네덜란드 저지대 인근에서 인기가 좋았다. 그가 보유한 지역은 스페인, 나폴리, 독일,  저지대 지역이었다. 그러나 독일 지역들은 말을 안듣고 스페인은 도움을 주기에는 너무나 멀었다. 그는 보편 제국을 지향했는데, 그가 하는 다양한 전쟁에 대한 비용을 조달할 만한 곳은 한군데 뿐이었다. 바로 네덜란드였다. 

 

*당시 베네치아인은 네덜란드에 대해서 매우 물가가 비싼 곳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점점 네덜란드에 대한 세부담이 가중되었다. 그의 동생 페르디난드는 스페인에서 인기가 좋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계승했다. 

 

*뉘른베르크의 돈많은 이들이 작센과 보헤미아, 슐레지엔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것이 이들 지역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고 종속적인 입장을 가지게 했다는 주장이 있다.

 

*프랑스의 파리가 처음부터 금융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다. 남부의 리용이 파리에 버금가는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후에 모든 기능이 파리에 넘어가고 말았다. 

 

*프랑스 서부의 브르타뉴 인들은 지중해에서 활동하면서 해적질을 하고 각지를 돌아다녔다. 이는 영국인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영국인 해적들은 남의 물건을 약탈하곤 했다.

 

*포르투갈에서는 개종한 척 한 유대인들이 돌아다녔다. 이들은 도시의 중요 상업계층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살던 지역에서는 개종한 가톨릭인인척 했으나 베네치아 같은 곳에 가면 사실은 유대인이라고 말하는 등 정체성이 가톨릭 교도가 아니었다. 베네치아 같은 곳에서는 이들을 유대인이라고 거부하는 대신 환영했다.

 

*포르투갈 인들은 바스코 다가마의 항해 이후 인도양을 잇는 교역로를 만들었고, 인도에 위치한 포르투갈의 요새들이 공격받는 와중에서도 무역을 멈추지 않았다. 스페인의 8분의 1정도 되는 인구를 가지고 인도양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맞서 싸웠다. 투르크는 인도양으로 가는 루트를 지키기 위해 포르투갈과 싸웠으나 패했다. 피리 레이스가 이이끄는 해군 선단이 포르투갈에게 패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지중해 교역이 붕괴하고 바로 대서양에 패권이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카스티야에서는 점점 왕의 권한이 강화되고 귀족들의 힘이 약화되었다. 귀족들이 요새를 짓고 포를 설치하고 강한 권한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점점 펠리페 2세의 힘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아라곤과 나폴리에서는 이를 비웃는 듯이 귀족의 권한이 굳건했다. 아라곤에서는 귀족들이 자신의 성에 대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발렌시아에서는 귀족이 악담을 한다는 이유로 노새를 타고 돌아다니게 하자 귀족이 마드리드로 가서 왕에게 청원하는 등 귀족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나폴리에서도 귀족들은 명령을 무시하곤 했다. 이들을 제어하는 요소는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 위협이나 민중의 봉기 위협뿐이었다.  아라곤 왕국 지역에 대해서 왕이 제대로 권한을 행세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지역이 프랑스와 가깝고, 때문에 혼란이 생기면 프랑스가 쳐들어올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카스티야의 경우, 마드리드가 잘 나가는 도시였던 것도 맞았고 당대의 카스티야 지역이 부유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스티야 지역의 넉넉한 곳도 인구의 5분의 1은 빈민이었다. 다른 지역은 이것보다 훨씬 상황이 안좋았을 것이다. 

 

*아라곤 인들은 바르셀로나, 발렌시아와 합쳐진 이후 점차 동쪽으로 진출했다. 그들은 발레아레스 제도를 정복하고, 코르시카와 사르데냐에 나아가는 한편 시칠리아와 나폴리까지 손에 넣었다. 이들은 대서양에 집중하는 대신 동쪽으로 나아갔는데, 공동왕 페르난도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만 역량을 지중해에 집중했다. 

 

*세계의 은은 유럽의 독일 중부 지역이나 신대륙 포토시 은광같은 곳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은과 금의 비율이 사대일이었으나 유럽에서는 십오대일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문에 막대한 은이 유럽에서 레반트로 유출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중국을 향해 갔다.

 

*15세기 이탈리아 국가들은 통일을 할 상화도 아니었고 이를 시도할 야망도 없었다. 때문에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모두 이를 실현할 수 없었고 그들간에 평화협정을 맺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지었다. 교황의 수입은 점점 교황령에 집중되었으며, 교황령에 있는 도시들의 재정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해 교황들이 노력했기 때문에 이들은 점점 세속군주와 같은 행태를 띠게 되었다.

 

*베네치아, 스페인, 프랑스, 영국의 세 수입이 얼마 차이나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베네치아는 자신들의 수입 상당수를 무역에서 벌었다. 지중해 교역량 중 반이 베네치아 교역량인 시절도 있었다. 

 

*스페인 군이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비롯한 저지대 지역에서 전투를 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들은 돈을 지폐가 아니라 금으로 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스페인에서 저지대에 금을 보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프랑스를 의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봉급 지급이 늦어지면 스페인 군대가 저지대 도시 중에 스페인에 충성하는 도시를 약탈하는 일도 있었다. 안트베르펜이 이런 식으로 공격당했다. 

 

*관직 매매 현상은 스페인, 나폴리, 오스만을 비롯한 다양한 곳에서 매우 흔한 현상이었다. 관직 매매를 왕이 내버려 둔 것이 결국 왕에게 손해로 다가왔다. 관직의 권한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기 위한 관습에 기반한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관직을 매매한 이들은 왕의 권한 집중을 막고 부패를 통해 왕의 힘을 빼놓을 것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경우, 원래는 관직 매매 현상이 심하지 않았으나 맘루크의 술탄을 제압하고 그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아 관직 매매가 판을 쳤다. 오스만 투르크의 경우 관직매매를 통해서 얻은 부가 대재상에게 집중되었다. 이러한 대재상이나 일부 관직을 가진 사람들의 부가 너무 커서 한계에 달할 정도가 되면 사형시키고 재산을  술탄이 가져가기도 했다. 이런 재산 몰수 사태가 발생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공적인 신용 제도가 오스만 투르크 내부에 부재했기 때문이다. 

 

*오스만은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그들의 기존 관직을 내버려 두고 권한을 보장해 주었다. 과거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에 그리스인들을 불러서 그들의 권한을 보장해주고, 기독교인 귀족들에게 발칸 내에 영지티마르를 하사한 것처럼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정책을 한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인구 밀도는 매우 낮아서, 이들이 유럽에 비해서 인구가 조밀하지 못했다. 때문에 오스만 투르크는 외지인에게 적대적인 것이 덜했다. 

 

*귀족과 도시는 왕국 내부에서도 왕의 권한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이런 문제는 왕이 점점 승자가 되어갔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칠리아의 경우 메시나의 권한이 너무 강하여 질서가 제대로 서지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 술탄의 권한 것은 강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거대한 대귀족층을 제대로 제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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