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마사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삼긱감밥 2021. 3. 23.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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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된 시점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어느정도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이미 당대에 60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황제는 여러 군 경험을 통해서 군대의 확고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데도 여념이 없었다. 이 점에서 그는 확실하게 네로와 달랐다. 비교적 잔인하고 무서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음에도 황제가 되자 좋은 통치를 펼쳤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로마를 효율적으로 통치했다. 오줌세를 비롯한 세금을 통해서 로마의 재무구조를 개선시키면서 10년 후의 통치 후 죽었다. 열병에 죽었다고 한다. 어차피 나이가 매우 많았으므로 자연사라고 봐도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장남이었던 티투스였다. 그는 성적으로는 좀 문란한 편이고 도덕을 잘 지키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인기를 사는 타입의 리더였다. 그가 즉위하고 나서 로마에 전염병이 돌고 화산이 폭발하는 등 안좋은 재난들이 발생했다. 티투스는 그런 재난을 정리하고 뒷수습을 하기 위해 매진했으나 2년간의 통치 후에 열병으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매우 안타까워하고 그를 그리워했다.

 

티투스가 2년의 통치 후에 죽자 그의 동생이자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인 도미티아누스가 뒤를 계승했다. 그는 평민에게는 좋은 통치를, 원로원에게는 불쾌한 통치를 했는데, 계속해서 그들이 싫어하는 통치를 벌이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정도가 과해서 원로원이 그를 불쾌하게 여겼다. 또한 그 자신도 다른 유력한 사람들을 암살하는 버릇이 있었으므로 암살을 행하다가 나중에는 본인이 암살당하고 말았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는 각자 방법은 달랐고 경험도 달랐지만 로마를 안정화하는데 성공한 황제들이다. 때문에 도미티아누스가 죽은 후에도 로마가 다시 내전에 빠지거나 황제가 교체되는 혼란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 점에서 베스파시아누스는 확실히 로마의 중요한 황제라고 할 수 있다.

 

원로원은 다음 황제로 네르바를 뽑았다. 네르바는 이미 당선된 시점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고 그동안 다른 황제 밑에서 사제직 등을 지내며 안전을 중요시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믿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네르바는 사람들의 요구때문에 도미티아누스 암살범들을 죽도록 했지만 원로원을 무시하진 않았다.

 

고령의 네르바는 하 게르마니아 군단의 지도자였던 트라야누스를 불러왔다.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입적시키고 네르바는 숨을 거두었다. 트라야누스는 군인으로 인기가 많았으므로 그가 로마에 오자 많은 사람들이 환영했다.

 

트라야누스는 황제가 되어 다양한 업적을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키아 원정이다. 그는 다키아의 왕과 전쟁을 벌여 승리했으나 이후 다시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친정하여 완벽하게 다키아를 복속시켰다. 이전에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다키아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굴욕적인 협상을 체결한 바 있었다. 그것을 트라야누스가 멋지게 갚아낸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완충지대를 없앤 것이라는 해석도 있긴 하다. 

 

다키아 원정에서 로마는 다키아 노예들을 얻었고, 로마제국의 전역병들을 모아서 다키아 제국지역에 정착시켰다. 다키아의 금광에서 금이 로마에 쏟아들어져 왔다.

 

트라야누스는 이후 자신의 후계로 하드리아누스를 지명하고 숨을 거두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 문화에 매우 관심이 많았던 황제였다. 그는 선대인 트라야누스와는 다른 군사적 전략을 취했는데, 방어적으로 국경선을 안정하기로 한 것이다. 트라야누스의 원정에는 많은 돈이 들었으므로 안정된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물론 이에 반대한 선대의 장군들이 있었으나 제거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브리튼 섬에서 하드리아누스 장벽이라는 벽을 세워서 북부 고지대의 사람들이 남쪽으로 약탈하러 오지 못하게 막았다. 또한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우고 그들의 문화에 심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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