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마사

포에니 전쟁과 로마의 성장

삼긱감밥 2020. 12. 5. 00:15
반응형

포에니 전쟁과 로마의 성장

 

“제 생각에는, 카르타고는 멸망해야 합니다.”

-로마의 정치가 카토(B.C. 234-149)

 

고대 중동 근방에 살았던 페니키아인들은 해양 무역을 발전 시키고 문자를 개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배를 타고 바깥에 나가서 무역을 했는데, 지중해의 해안가에 거점을 마련해두고 무역로를 개척하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다. 기원전 8세기에 건설된 카르타고(현재의 튀니지 지역에 위치)가 점차 성장하여 이 해안 도시들의 맹주가 된다. 히스파니아(현재의 스페인), 사르데냐 섬과 아프리카 북부 지역 등이 주된 거점이었다. 이들은 해양 무역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했으나 원주민인 페니키아인의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인구는 적은 편이었고 군사는 용병에 의존했다. 바알 신앙을 믿었으며 정치적으로는 공화정이었다.

 

한편 로마는 현재의 이탈리아 지역에 위치했으며, 초기에는 왕정에 기반하였으나 이후 상류 계급의 원로원과 일반 민중의 민회를 중심으로 하는 공화정 체제로 나아간다. 처음엔 작은 국가에 불과했지만 개방적인 정책을 기반으로 주변 국가를 통합하여 현재의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를 제압했다. 카르타고와는 달리 대부분의 군사는 로마인이었고 용병의 비중도 적었다. 로마인들의 종교는 다신교였다.

 

카르타고와 로마는 서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시칠리아에서 충돌한다. 이 전쟁을 카르타고의선조인 페니키아의 이름을 따와서 Poeni war,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146년까지 백여 년 동안 총 3차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해전에서 카르타고를 격파하여 카르타고의 섬 지역을 빼앗았고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완전히 쫓아낸다. 이후 기원전 218년 무렵 히스파니아에서 일어난 분쟁이 발단이 되어 전쟁이 발발했는데, 이것이 한니발과 알프스 산맥의 일화로 유명한 제2차 포에니 전쟁이다.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기원전 247~기원전 183)은 아프리카에서 모은 병력을 이끌고 프랑스 남부 지역을 지나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 북부로 행군하였다. 알프스 산맥을 행군하기 위해 아프리카 코끼리군을 비롯한 카르타고군 상당수가 로마와 싸워보기도 전에 소모되었으며 한니발 본인도 한쪽 눈을 잃었지만 한니발은 계속해서 진군하여 로마군과 전투를 벌여 트레비노와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승리한다.

 

당시 로마에는 전투를 피하고 전쟁을 지연하자는 파비우스와 결전을 벌이자는 바로가 있었는데, 바로가 지지를 받아 한니발과 칸나이에서 대전한다. 바로가 이끈 8만명의 로마 군대는 전술의 달인이었던 한니발의 5만여 병력에 포위 섬멸당해 로마군은 참패하고 만다. 이후 파비우스가 다시 지도자로 선출되고 파비우스는 전쟁을 피하고 질질 끌면서 해군을 통해 보급을 막고 한니발의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고 이 전략이 성공하여 제2차 포에니 전쟁도 로마의 승리로 돌아간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싸우지 않고 거둔 승리, 혹은 인내 끝에 끝끝내 거둔 승리를 ‘파비우스의 승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후 카르타고는 사실상 로마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한니발은 외국을 떠돌다 죽게 되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도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멸망한다.

 

포에니 전쟁을 통해 로마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의 뒤를 잇는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성장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정복하고 노예들을 이용한 대규모 농장 경영을 실시했는데 이를 라티푼디움이라고 한다. 로마의 자작농들은 대규모 농장과의 경쟁을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승전했음에도 로마의 자작농 계층이 붕괴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라쿠스 형제가 농지 개혁을 시도하나 실패하고 살해당하면서 로마 사회의 갈등이 증폭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