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동유럽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국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헝가리 왕국이었다.
폴란드는 10세기 무렵 슬라브족의 일파가 건국하였으며, 초기엔 피아스트 왕조가 다스렸다.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은 1386년에 이웃인 리투아니아의 야겔로 대공과 결혼한다. 이후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를 따라 이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두 군주의 결합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강건한 유대를 유지하게 된다. 두 국가는 1410년 그룬발트(독일명: 탄넨베르크)에서 독일 기사단을 격파하고 동유럽의 패권을 쥐게 되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같은 군주를 공유하는 동군연합을 유지하는 한편 오스트리아의 견제를 받아가며 헝가리와 보헤미아에 야겔로 왕조의 군주를 파견하여 세력을 넓혔다. 1569년 루블린 조약으로 두 나라는 의회를 갖는 연방 공화국으로 통합되었다. 3년 후 야겔로 왕조의 마지막 왕이 죽었고,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왕을 선거로 뽑게 되었다. 이 체제는 당시로서는 가장 민주적인 체제였다. 폴란드의 중심지는 초기에 크라코프와 그니에즈노 일대였지만 16세기 이후에는 바르샤바로 바뀌었다.
그러나 폴란드 의회는 만장일치로 안건을 결의하여 몹시 비효율적인 체제였고, 도시민의 성장도 미약하여 의회 구성원은 지주 귀족들이었다. 귀족들 대부분은 문맹이었고, 상당수는 언제든지 외국의 사주를 받아 연방을 배신하거나 반대표를 던질 의향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거로 채택한 국왕이 의회에 특권을 부여하여 의회는 무소불위의 존재가 되었다. 이런 체제는 군주의 폭정을 막았지만 군주의 개혁 역시 막을 수 있었다. 결국 폴란드는 18세기말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손에 3분할되며 사라진다.
헝가리는 10세기 무렵 헝가리 평원에 정착한 마자르족의 국가였으며, 동방이 원류인 국가였기 때문에 나름의 독특한 풍습과 문화를 유지했다. 종교는 가톨릭이었고 왕의 권한이 강하지 않았고 귀족의 권한이 강하였으며 왕이 없을 때에는 폴란드의 야겔로 왕조에서 왕 후보를 데려오기도 했다. 수도는 다뉴브 강 인근의 부다였으며 후일 페스트를 합병하여 부다페스트로 통합된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술래이만 1세(재위 1520~1566)가 1526년 대군을 이끌고 유럽에 쳐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동유럽의 소국들은 사실상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할 힘이 없었다.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은 폴란드 야겔로 왕가 출신의 라요슈 2세(1506~1526)로,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 싸우기 위해 2만의 군세를 이끌고 내려왔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 군대는 모하치 전투에서 대승했고 라요슈 2세는 전사한다.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을 겸했던 라요슈 2세가 죽었기 때문에 전쟁에 앞서 라요슈 2세와 정략결혼 관계를 맺었던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가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게 되었다. 헝가리는 분할되어 서부는 오스트리아, 중부와 동부는 오스만 투르크의 손에 넘어간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중부유럽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1620년, 1683년에 2번에 걸친 수도 빈 포위로 위기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 오스만 투르크를 물리치고 제1차 세계대전까지 강국으로 남게 된다. 헝가리는 오랜 세월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받았지만 오스트리아는 19세기 중반 헝가리의 자치권을 인정하여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이 지배 계급이 되고 슬라브인이 피지배계급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왕국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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