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미축 자중 麋竺 子仲

삼긱감밥 2020. 12. 13. 23:18
728x90

미축은 삼국시대 촉나라 사람이다. 자는 자중이며, 생년은 전하지 않고 몰년은 220년즈음이다. 동해군 구현 사람으로, 선조의 대부터 계속 서주에 살면서 오랫동안 재산을 모은 대부호의 후손이다. 미씨 가문의 고용인만 1만명이 넘었다고 하니 엄청난 부호였던 것이다.

 

도겸은 한나라 서쪽 변방에서 반란군 토벌에 종사한 이후 서주목이 되었는데, 이때 미축을 불러서 별가종사로 삼았다. (그밖에도 도겸은 인재를 모으기 위해 노력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서쪽 변방에서 동쪽의 서주로 부임한 도겸으로선 별다른 인적 네트워크가 없었을테니 지역의 유지이자 부호인 미축이 돕는다면 안정적으로 정치를 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도겸이 죽은 후에는 유비를 맞이했다. 유비가 원술과 싸우는 틈을 타 여포가 배신하고 하비성을 빼앗자, 유비는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미축은 자신의 노비 2천명을 유비에게 보냈고, 금은 재화를 군자금으로 쓰게 했으며, 자신의 여동생을 유비의 아내로 삼게 했다. 유비는 미축의 지원을 재기의 기반으로 삼았다. 조조가 미축과 미방 형제를 초빙하려고 당시 편장군이던 미축을 영군태수(태산 근방), 미방을 팽성 상으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둘은 응하지 않고 유비를 따라갔다.

 

유비가 원소를 떠나 유표에게 향할 때 손건과 함께 유표에게 사자로 갔으며, 이후 좌장군 종사중랑이 되었다. 익주 평정 이후에는 안한장군이 되었는데 명목상 서열은 군사장군 제갈량보다 높았다. 유비는 그를 항상 상빈의 예로 대접하고 상과 총애를 많이 내렸다. 어려운 시절부터 그를 모시며 궂은 일을 했고 재정적으로도 지원해주었으니 인재와 돈이 부족한 유비에겐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먼저 조조에 의해 팽성의 상이 되었던 미방 역시 미축과 함께 유비를 섬겼는데, 형주의 남군 태수로 있을 적에 관우와 불화하여 배신하고 손권을 따랐기 때문에 미축은 스스로를 결박하고 처벌당하길 빌었으나 유비는 형제의 죄가 연루되지 않는다고 위로하고 정중히 대우했다. 그렇지마 미축은 분노와 수치심에 병이나 앓다가 1년여 만에 죽었다.

 

미축은 활도 매우 잘쓰고 말도 잘 탔지만, 유비는 미축이 리더십이 없다고 보고 군대를 맡기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지 않았지만 장군이 된 진나라의 두예와는 대비된다.) 호분중랑장이 된 아들 미위도, 호기감이 된 손자 미조도 활도 잘쏘고 말달리기를 잘했다고 한다.

 

세간에서는 흔히 미축을 간옹,손건과 함께 간손미라고 묶어서 어정쩡하고 책사도 못되는 문관3인방으로 농담삼아 불리지만, 외교업무에 종사했던 것을 제외하면 간옹,손건과는 대우도 다르고 고향도 달랐으며 출신성분, 재력부터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미축은 황제의 외척이기까지 했다. 말년이 애석할 따름이다.

728x90

'삼국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지 백묘 鄧芝 伯苗  (0) 2020.12.13
요화 원검 廖化 元儉  (0) 2020.12.13
종예 덕염 宗預 德艶  (0) 2020.12.13
간옹 헌화 簡雍 憲和  (0) 2020.12.13
손건 공우 孫乾 公祐  (0) 2020.12.13
이적 기백 伊籍 機伯  (0) 2020.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