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마틴 래디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슬라브 동유럽학 대학 마사리크 교수라고 한다. 뭔지는 잘 모르겠으나 동유럽에 관한 학문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책은 합스부르크 가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책이다. 시기적으로는 중세 합스부르크 가문부터(역사가 불분명하여 10~11세기 무렵부터 시작한다.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기록에 따르면 로마시대의 이야기도 있으나 믿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1차대전 패배로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제국이 패망하고 해체되는 과정까지를 그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혼인과 상속으로 유명한 가문이다. 이들은 끝까지 살아남고 장자를 남겨서 다음 세대로 가문이 이어지게 했다. 이를 통해서 남부 독일 및 스위스 일대의 작은 가문이었으나 혼인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인근을 다스리는 가문이 되었다.
인근의 라이벌인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 등과 갈등하기도 하고, 보헤미아 왕을 하던 룩셈부르그 가문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을 두고 다투기도 했다. 늘 이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으나 합스부르크의 군주들은 외교와 협상을 통해서 최대한 접점을 찾으려는 시도를 많이 했다.
이후 부르고뉴 상속으로 저지대와 부르고뉴를 획득하고, 보헤미아와 헝가리왕을 겸했던 야기에우워 가문의 라요슈 2세가 오스만에 패사하면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헝가리 서부지역을 얻는다. 헝가리는 서부의 오스트리아 지배 지역과 중부의 오스만 지배지역, 동부의 오스만의 봉국인 트랜실바니아(훗날 신교도가 크게 늘었다) 지역으로 쪼개진다.
늘 궁금했던 것중 하나가 신성로마제국 각 지역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에게 얼마나 돈을 냈느냐 였는데, 특별한 상황이 없으면(극단적인 오스만의 서진 이랄지) 매우 적었다. 오스트리아 내부 수입보다 많이 적었던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위신이나 외교적 지위가 중요한 것이지 돈은 별로 안되었다.
스페인의 이사벨라와 페르난도의 후손이 합스부르크계로 이어지면서 스페인과 그 식민지, 남부 이탈리아까지 합스부르크 손에 들어가게 된다. 카를 5세는 이 모든 것을 다 손에 쥐고 세계 제국을 꿈꾸었으나, 실제 돈을 감당한 것은 대부분 저지대 지역이었다. 때문에 저지대와의 관계가 매우 좋았다가 결국 매우 나빠지면서 저지대 지역은 독립을 꾀하게 된다. 그는 종교 전쟁의 실패로 낙심하고 우울증 증세를 겪으며 퇴위하였다.
이후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브루크 왕조는 쪼개지게 된다. 스페인쪽은 점점 심각한 질환을 겪는 군주들이 즉위하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가문이 끝나게 된다. 스페인의 각 식민지역들은 스페인의 명령은 집행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자유롭게 지냈다.
루터의 개혁 이후 합스부르크 지배 지역내에 신교도들이 크게 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크게 관심이 갔던 것은 합스부르크 군주들의 온건한 태도이다. 대부분의 경우 군사적인 해결책 보다는 외교적인 해결책을 선택했고, 종교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군주들도 유독 많았다.
이는 큰 도움이 되었는데, 신성로마제국 내의 가톨릭 제후들도 사실 합스부르크 군주들의 영향력 강화를 다 싫어했고, 합스부르크 지배 지역은 모두 왕에게 개인적으로 연결된 것이었으므로 가지각색의 다양한 모습을 띠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이런 합스부르크 군주들의 태도를 미심쩍게 바라보았으며 보헤미아, 헝가리의 왕비이자 훗날 저지대 총독이 되는 오스트리아의 마리를 헝가리 신교도들의 보호자라고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독특한 점은 16세기 합스부르크 군주들도 가톨릭에 그다지 적극적인 느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어떻게 봐도 부정적인 이들도 있었다. 구교도인지 신교도인지 물으면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거나 종교와 관련된 주제는 회피하고 딱히 신앙과 관련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 꽤 있었다. 보헤미아의 많은 신교도들도 꽤 오랜 기간 숫자가 늘어나는데 적극적으로 제지당하지 않은 느낌이다. 이 책을 읽으면 프라하 창문투척사건이 아니었으면 30년전쟁이 필연적으로 발발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태도는 30년전쟁 이후 신교도에 대한 강공으로 바뀌면서 합스부르크 왕가 지배 지역들은 가톨릭 우세 지역으로 바뀌게 된다. 군사적으로는 빈 포위때 위기를 겪었는데, 폴란드 소비에스키의 도움으로 오스만을 물리치며 중부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굳히게 된다. 오스트리아 당시 방어군이 적게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합스부르크는 발흥하는 신흥 강자 프로이센에게 패하고, 나폴레옹에게 엄청난 패배를 당한다. 요제프 2세는 계몽군주로서 다양한 정책을 시도하려 했으나 헝가리의 완고한 보수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오스트리아 내의 지식인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은 프리메이슨 등의 활동을 하였음에도 어디까지나 대부분 공무원들이었기에 독립적인 단체를 갖추지 못했다.
나폴레옹 실각 이후 메테르니히가 외교를 통해 유럽을 다스렸으나, 그는 정작 내치에는 별 영향력이 없어서 권한 부족을 푸념했다고 한다. 1848 자유주의 혁명시기 합스부르크 조는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려 했으나, 빈과 프라하, 헝가리에서 일어나는 연쇄적인 불안에 군부가 개입해서 강경책을 펴게 된다. 결국 군주는 퇴위하고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한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말년은 프란츠 요제프가 맡게 되는데, 그는 완고했으며 성실했고 무능했으며 타이밍을 잘 잡지 못했다. 사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을 잃었고 제국의 패망까지 제국과 함께했다. 아들은 젊은 나이에 죽었고 막시밀리안은 멕시코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사형당했으며(그는 멕시코 내 보수파에게 어울리기엔 진보적인 정책을 지지했고, 개혁파 입장에선 황제라는 그 직위 자체가 증오의 대상이었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발흥하고 반란이 끊이지 않자 프란츠 요제프는 한차례 헝가리 주요 군부 인사를 교수형에 처했으나 결국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 체제를 출범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쪽의 시스라이타니아와 헝가리 쪽의 이슈트반 왕관령으로 나뉜다. 헝가리는 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의 민족주의를 탄압했다. 보헤미아와 크로아티아, 폴란드 지역이 남아있었고 주 지배민족인 독일인과 헝가리인 인구가 반이 안되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말년에 요제프 황제는 행진 행사를 기획하는데, 합스부르크 옛 인물을 기념하며 사람들을 모으는 행사였다. 보헤미아는 기념된 인물이 보헤미아의 영웅 오타카르 2세를 격파한 인물이라고 싫어서 안오고, 헝가리는 요제프가 옛날에 헝가리 군부 인사를 죽인걸 생각해서 안온다. 비교적 낙후된 지역의 사람들을 돈을 주고 모으자 각 지역 사람들이 제국 내의 빈곤을 체감하는 절망적인 느낌의 행사가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는 외교적으로도 실패하여, 헝가리 반란을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었던 우군 러시아를 이후 잃어버렸다. 러시아는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개판속에서도 어떻게 제국이 유지가 되긴 했다. 이중왕국 체제 이후 헝가리인들은 지도국으로서 발돋움했고, 중부 슬라브인들은 제국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보헤미아의 팔라츠키 등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합스부르크 제국이 망하면 러시아가 중부유럽까지 들어올텐데 그것보단 지금이 낫다고 생각했다. 제국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유지할 필요성이 있었다. ㅋㅋ
20세기 초반, 정치가 매우 혼란했던 세르비아 인사들은 보스니아와 인근 슬라브 지역을 하나로 지배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던 중 사라예보 사건이 터졌다. 합스부르크는 바로 선전포고하지 못했는데 군인들이 농민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 인해 뒤늦게 선전포고하면서 타이밍이 어그러지게 된다. 헝가리쪽은 전쟁에 반대하였으나 세르비아인들이 헝가리도 노릴 지도 모린다는 말에 합류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군은 러시아군에 대패하면서 많은 인구가 죽었고, 독일의 영향력에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가 결국 독일도 패하면서 해체된다.
이 책은 나에게 매우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일부 합스부르크 군주들의 종교에 대한 냉소였고 매우 인상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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